[권혜림기자] 영화 '4등'(감독 정지우, 제작 정지우 필름, 국가인권위원회)을 둘러싸고 풀어놓을 이야기는 많다. 직관적인 제목은 성적만능주의 교육관의 위험성을 상기하게 만드는데, 결코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영화가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올리는 문제의식은 그 의도와 목적이 무엇이든 불온하게 여겨져야 하는 폭력, 그리고 그 재생산에 대한 것이다.
영화는 재능은 있지만 만년 4등인 수영선수 준호(유재상 분)의 이야기다. 준호에게는 1등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엄마(이항나 분)가 있다. 아들이 수영에 재능이 있다고 믿고, 어떻게든 더 높은 등수를 얻게 만들려 고군분투하는 소위 '극성 엄마'다. 엄마는 새로운 수영 코치 광수(박해준 분)를 소개받고, 그에게 아이를 맡기게 된다.
하지만 첫 수업부터 PC방에서 시간을 때우는 코치 광수의 행태는 어딘지 이상하다. 수영 수업에서 그의 행동들은 심지어 끔찍해지는데, 기록을 단축하지 못하는 아이의 등짝과 허벅지를 사정 없이 체벌한다. 물 속에서 아이의 집중력이 흐트려졌다고 판단될 때도 마찬가지다. 수영을 좋아할 뿐 불꽃 튀는 승부욕은 없던 준호는 그와 함께 훈련하며 실력은 향상되지만 점차 자신이 처한 상황에 의문을 갖게 된다.
영화는 극의 도입부 흑백의 플래시백 장면들을 통해 광수의 전사를 제시한다. 체벌이 관행적이었던 분위기 아래 수영을 배운 비운의 천재. 현재의 광수는 천부적 재능을 믿고 나태했던 자신이 체벌을 견디지 못해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때로는 물리적 체벌이 교육에 유효한 수단이 된다고 믿는다.
놀랍게도 이런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겨온 인물은 '은교' '사랑니' '해피엔드' 등을 연출한 정지우 감독이다. 그간 주로 남녀 간의 정념에 눈길을 둔 채 섬세하면서도 유려한 수작들을 내놨던 그가 '4등'을 통해서는 교육 현실, 나아가 한국 사회에 만연한 폭력에 대한 시선을 되짚었다.
언론 시사를 놓쳐 압구정에서 열린 일반 시사를 통해 영화를 보고 감독을 인터뷰하러 왔다고 말하자, 정 감독은 관객석의 분위기에 대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흔히 '강남 엄마'라는 말로 지칭되는, 교육열이 높다고 알려진 지역의 관객이 '4등'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어쩌면 일부 엄마들이 불쾌해할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도 보이듯 엄마가 가진 마음 속 여린 지점, 헌신과 고민의 대상으로서 아이를 대하는 기분이 통한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관객들의 반응도 궁금했고요."
영화의 초반부, 어린 광수(정가람 분)가 태릉에서 훈련을 받던 에피소드는 흑백으로 처리돼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는 획일적으로 재구성된 폭력의 기억을 은유한다. 정지우 감독은 "사실 광수는 자신이 도박을 하다 훈련에 빠진 것이니 동정을 받을 수 없다"며 "광수 본인이 잘못한 일이라고 치자. 감독은 '널 위해서'라는 이유로 광수를 때렸다. 그렇다면 그 폭력은 관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나"라고 질문을 던졌다.
"광수가 감정적인 요인 없이 준호의 절박함을 위해 때리는 장면들이 있어요. '붐업' 해주는 차원에서 체벌을 하는 것이니, 일방적으로 뭐라고만 할 수는 없겠죠. 그런데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은 준호가 그로부터 배운 폭력을 남동생에게 행사하는 장면이에요. 광수가 동생에게 '맞을 짓을 했냐'고 물을 때요. 동생은 고작 형의 물건으로 수영을 한 것 뿐이니 아무도 그것이 '맞을 짓'이라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그 폭력의 시작이 뭔지 따져보면, 우리가 '맞을 짓'이라고 마음으로 동의해준 어떤 것이잖아요. 그것이 변형되고 되물림되면서 광수의 코치에서 광수에게, 거기서 다시 준호에게, 준호의 남동생에게까지 온 것을 보면, 폭력을 쉽게 관용적으로 바라봐선 안된다는 이야기가 녹아있는 것이죠."
'4등'은 자극적인 소재나 화면 없이도 '무엇이 맞을 짓인가', 그리고 '맞을 짓은 있는가'에 대한 자문을 수월하게 건네온다. 폭력을 행사하는 기준에 대한 자의적이고도 주관적인 판단이 궁극적으로 어떤 위험성을 품는지, 관객은 영화를 통해 충분히 사고하게 된다.
"폭력을 허용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일은 너무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문제잖아요. 그래서 이 문장에 다다랐어요. '맞을짓이 없다'라는 문장이요. 그게 옳은 문장인 것 같아요. 맞을 짓이 없다면 당장 어렵겠죠. 학교엔 말도 안되는 문제아들이 많고, 가르치기는 또 얼마나 힘들겠어요. 하지만 뭔가 더 좋은 방법을 찾자고, 그런 기분으로 생각을 정리했어요. 영화를 시작하기 전엔 완전히 알지 못했던 것을 절반쯤 이해한 기분이었다면 촬영을 하며 모두 이해하고, 완성하며 자신감이 붙은 셈이에요."
영화를 본 관객에게 신선하고 놀라운 감흥을 주는 것은 대체로 균일하게 휼륭한 배우들의 연기다. 준호 역의 아역 유재상은 물론, 극성스러운 열혈 엄마 역을 연기한 이항나, 아빠 역의 최무성, 광수 역의 박해준 등 빈틈이 없는 캐스팅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특히 배우 이항나의 얼굴은 낯설고도 새롭다. 연극 무대에서 주로 기반을 닦은 베테랑 연기자다. 그가 그려낸 엄마의 얼굴은 지극히 현실적이라 더욱 서글프다. 자신의 삶보단 아이의 삶에 모든 시간과 고민을 투자하고, 소원조차 아이들을 위해서만 비는, 그래서 늘 불안하고 버거운 엄마의 표정이 화면에 가득하다.
"어린 여학생들이나 여성 관객들은 엄마 역을 보며 '왜 저렇게 늙었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사실 조금만 벗어나보면 엄마가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악질이고 지독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불안하기 때문이거든요. '이러다 내 아이가 대학에 못가면, 혹시 사람 구실 못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고민 때문이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자격'이라는 '금'을 생각하면, 우리 자식들이 힘든 대우를 받고 살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두렵겠어요. 그래서 결국 '너는 잘 모르니, 엄마가 결정해줄게' '나중에는 나에게 고맙다 고 할 거야'가 되는 것이고요. 영화에서 엄마는 아무것도 없는, '제로'에 가까운 안타까움의 캐릭터인 거예요. 그런 면에서 이항나 배우가 너무 고마웠어요. 어려운 역이라 잘못하면 그냥 뻔한 사람이 돼버리는데, 아주 그 사이를 교묘하게 절묘하게 연기한 것 같아서요."
'4등'은 지난 13일 개봉해 상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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