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기자] 넥센 히어로즈는 포스트시즌에 오를 만한 팀인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김시진 감독 경질에 수긍할 것이다. '전력이 탄탄해진 건 맞지만 가을야구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고 생각한다면 이번 조치에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야구계의 주된 의견은 후자다. 그러나 넥센 경영진은 전자라고 생각했다. '가을 잔치'에 오를 팀을 만들어줬는데, 실패했으니 감독 책임이라는 게 넥센 구단 측의 판단이다.
넥센 구단 고위층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지난해 초반 김 감독과 3년 재계약을 할 때만 해도 '오래 보고 팀을 만들라'는 신호로 판단한 사람이 많았다. 이택근과 김병현을 영입한 지난 겨울에는 "이제야 언론의 주목을 끌 수 있게 됐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플레이오프 진출을 거론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기대'에 가까웠을 뿐이다. 객관적으로 넥센은 여전히 부족한 게 많은 팀이었기 때문이다.
시즌 초반만 해도 넥센은 모든 게 장밋빛 같았다. 4월26일 3위로 뛰어오른 뒤 한동안 그 자리를 유지했다. 5월19일 2위로 상승하더니 23일엔 선두까지 치고 올라갔다. 이후 넥센은 5월 내내 1~3위를 유지하며 '강팀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6월에도 2∼4위를 오가던 이 팀은 후반기에 접어들어 급격히 페이스가 처졌다. 이후의 스토리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8월2일 6위로 추락하더니 현재까지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개막 전 넥센을 '아직 먼 팀'이라고 판단한 이들이 많았던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넥센은 전력이 생각만큼 탄탄한 팀이 아니다. 몇몇 포지션에 올스타급 선수가 포진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론 리빌딩 구단의 향기가 짙었다. 우선 선수층(depth)이 빈약하다. 포수 허도환과 2루수 서건창 등이 두각을 나타냈지만 몇몇 주전급 선수가 부상으로 이탈하면 이를 메울 자원이 턱없이 부족하다.
둘째, 야침차게 영입한 이택근과 김병현은 이름값 높은 스타들임에 분명하지만 이들은 의문부호를 단 선수들이다. 총액 50억원에 FA 계약을 하고 다시 불러들인 이택근에겐 과도한 몸값을 줬다는 의견이, 김병현의 경우 최근 4년간 제대로 공을 던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의구심이 따라 붙었다. 결국 이들의 올 시즌은 이런저런 이유로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무엇보다 야구란 스포츠의 본질이 그렇다. 스타 한두 명 합류했다고 약팀이 갑자기 강팀으로 변하지 않는다. 신인 드래프트에서의 옥석가리기, 2군 육성, 적시의 트레이드와 과감한 FA 영입 등이 두루 어우러져야만 뚜렷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리빌딩을 결심한 순간부터 최소 5년은 걸려야 최상의 전력 구축이 가능한 일이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구단 운영에 필요하다며 주축 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로 팔아치운 구단이 넥센이다. 몸값 비싼 선수 두 명을 영입했다고 '우리도 큰 돈을 투자했으니 당장 결과를 보여달라'는 건 야구를 제대로 아는 인사들이라면 납득하기 어려운 요구다.
하지만 넥센 경영진은 이런 야구계의 중론과 정반대로 판단했다. '이만하면 됐으니 당장 포스트시즌에 올려 놓으라'며 한 팀에서만 19년간 동고동락한 지도자를 닥달했다. 그리고 결과물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자 '팀 체질 개선을 위한 조치'라며 단칼에 감독의 목을 쳤다. 그것도 시즌이 끝나지 않은, 태풍이 몰려오는 음산한 시각에 맞춰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야구에서 감독은 대단한 지위를 누린다. 특히 한국의 경우 감독이 선수단과 관련된 거의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 엄청난 특권이 주어진다. 메이저리그식 '단장 야구'는 여러모로 발을 붙이기 쉽지 않은 풍토다.
그렇지만 감독은 엄연한 피고용인 신분이다. 언제 계약 해지될 지 모르는 '비정규직'이다. 권리와 함께 책임도 분명하다. 마음에 안 들면 구단은 마음껏 '칼'을 휘두를 수 있다. 넥센은 자신들의 권리를 확실하게 행사했다. '지원도 늘렸고, 선수도 사 줬다. 그런데도 성적을 못 내면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당연하다'는 속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조치가 향후 어떤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지는 알 수 없다. 후임 감독이 누가 됐든, 내년 시즌 넥센은 '무조건 포스트시즌 진출'이란 절대 과제를 안게 됐다. 목표치에 조금이라도 미달한다면 언제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이제 넥센 감독은 '독이 든 성배'까지는 아니더라도 만만찮은 부담을 안고 선수단을 이끌어야 할 자리가 됐다. 지금 하마평에 오르는 몇몇 인물들이 마냥 기대감만 갖고 있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하의 뉴욕 양키스는 1990년대 중반 '신 왕조'를 열기까지 10여년에 걸친 암흑기를 보냈다. '돈만 쓰면 모든 게 잘 풀린다'는 조지 스타인브레너 당시 구단주의 잘못된 믿음이 결정적이었다. 그는 조금만 성에 안 차면 마음 내키는 대로 감독을 갈아치우면서 선수단에 간섭했다. 그랬던 그가 조용해지자 공교롭게도 양키스는 살아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20년 가량 메이저리그의 '파워 하우스'로 군림하고 있다.
물론 넥센은 양키스가 아니다. 양키스처럼 돈을 펑펑 쓸 수도 없으니, 체질 자체가 허약한 넥센을 이끌어온 김시진 감독으로선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고위층의 상황 인식만 보면 이번 넥센의 김 감독 경질에서 30여년 전 양키스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넥센의 다음 행보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