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드라마 열풍이 새로운 바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하루 자고 나면 '누구네 집에 TV 샀다더라'는 얘기가 동네에 퍼지던 시절이다. 당시 우리 시청자들에게 소개된 미국 드라마로 대표적인 것이 '초원의 집'과 '600만불의 사나이'. 이들은 그동안 '여로'나 '신부일기'에 익숙해 있던 우리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문화적 쇼크'를 던져줬다. 이들 미국 드라마가 방송되는 시간에는 거리에 인적이 드물어질 정도로 시청자들이 열광했었다.
소머즈, 형사 콜롬보, 미녀3총사, A특공대, 맥가이버, 전격제트작전, 에어울프, 머나먼 정글, 아이언맨, 블루문 특급, 레밍턴 스틸, 브이, 베벌리힐즈 90210 등 잇따라 국내에 소개된 미국 드라마들 역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70, 80년대는 '문화콘텐츠'가 양적인 면에서나 다양성에서 매우 빈약했던 시절이다. 그런 환경에서 미국 드라마는 소재의 색다름, 스케일, 엔터테인먼트적 요소 등에서 우리 시청자들에게는 '세계를 보는 새로운 창'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미국 쏠림'이 심하긴 했지만...
요즘 사람들이 그 때보다 더 미국 드라마에 열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70, 80년대의 경우 '즐길 거리'가 지금보다 적었다는 점에서 보면, 당시 미국 드라마에 대한 열광은 오히려 지금보다 그 강도가 더했다고 볼 수도 있다.
팝송이 퇴조하고 토종 노래들이 인기를 얻은 것처럼, 볼거리가 많아진 토종 드라마에 밀려 미국 드라마는 한동안 시들해지는 듯 했다. 그러다 최근 들어 미국 드라마 열풍이 다시 부는 형국이다.
요즘 '미드 열풍'은 70, 80년대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대중에게 알려지고, 인기를 모으고, 유통되는 '콘텐츠 순환의 과정'이 확연히 다르다. 특히 그 과정에서 '네티즌'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다르다.
과거 전성기를 누렸던 미국 드라마들은 국내 공중파 TV가 선정(일방적으로)하는 것을, 공중파 TV가 지정한 시간에 TV 앞에 대기하여, 공중파 TV가 틀어주는대로 볼 수 밖에 없었다. 공중파 TV '일방주의'였고, 시청자는 수동적인 '구경꾼'일 수 밖에 없었다.
방송사로서는 미국 현지에서 검증이 끝난 드라마만 골랐고, 싼값에 들여 오기 위해 심지어 미국에서 방영된지 10년이 지난 드라마를 틀어주기도 했다.
시청자들은 방영 시간대를 놓치면 재방송이 있기 전에는 다시 시청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케이블 TV와 인터넷의 등장이 이 같은 흐름을 바꿔 놓기 시작했다.
미국 드라마를 접할 수 있는 TV 채널이 수십개로 늘어났고, 네티즌들의 입소문을 통해 먼저 알려지면 방송사가 뒤늦게 드라마를 사서 방송하는 경향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 다(多)채널, 인터넷을 촉매로
90년대 초반 국내에 소개된 '엑스-파일(1993년)'과 '프렌즈(1994년)'는 국내 젊은층들에게 크게 어필하며 폭넓게 마니아층을 형성했다. 이 두 드라마는 PC통신에서 관련 동호회가 등장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공상과학 미스테리 스릴러물인 '엑스-파일'은 에피소드마다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시켰고 '프렌즈'는 시트콤이라는 장르의 매력을 전파했다.

'엑스-파일'의 경우 공중파인 KBS를 통해 인기를 모았지만, 마니아층을 형성하면서 인터넷을 통한 정보교류를 촉발시키는 현상을 낳았다.
'프렌즈'는 공중파가 아닌 케이블(동아TV)의 드라마 콘텐츠 확산에 불을 지핀 계기가 됐다. 'CSI'시리즈 역시 공중파 뿐 아니라 케이블이 유통 채널로 가세하면서 급속히 확산된 전형적 사례다.
특히 이들 드라마에 빠진 마니아들은 또 다른 '엑스-파일', 또 다른 '프렌즈'를 찾아 미국 드라마에 대한 정보 수집에 나섰다. 이들은 자발적, 능동적으로 미국의 방송사 사이트 등을 헤집고 다니면서 새로운 정보들을 찾아내 다시 국내에 전파하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했다.
바로 이들이 요즘의 미국 드라마 열풍을 특징짓는 트렌드를 형성하는 초석을 마련했다.
◆마니아층 통한 '공유'의 등장
미국 드라마는 케이블과 인터넷을 통해 본격적인 마니아층을 형성하기 시작했지만 누구나 다운받을 수 있는 본격적인 공유개념은 대용량을 저장할 수 있게 된 인터넷 인프라의 발달과 함께 생겨났다.
대용량의 파일을 마음대로 저장할 수 없었던 초기 인프라에서는 각 대학이 보유하고 있는 FTP(파일 전송 프로토콜) 서버가 그 산파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파일전송 속도의 증가와 함께 대용량 저장이 가능한 온라인 사이트의 등장, 개인 P2P 발달의 가속화 등으로 누구든 온라인 접속을 통해 다운로드가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네티즌들은 지난 2005년 MBC를 통해 시즌2까지 국내에 소개된 '24시(2001년)'가 미국 현지에서는 이미 많은 시즌이 진행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자 네티즌들은 본격적으로 P2P와 각종 대용량 파일 저장 사이트와 동호회를 통한 공유 시스템을 구축하여 프로그램을 서로 돌려보기도 했다.
◆ '거의 실시간'으로 한국에서 시청가능해져
대용량 파일의 저장과 다운로드를 통한 공유가 가능해진 미드족들은 이제 거의 실시간으로 미국 드라마를 다운받을 수 있게 됐고 더불어 자막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동호회까지 만들어냈다.
의학, 과학 등 전문적인 용어가 나오는 미국 드라마일수록 이런 자막동호회의 활약은 눈부시다.

다양한 전문가 그룹으로 짜여진 자막동호회는 화면을 입수한 후 빠르면 1시간, 늦어도 24시간 안에 수차례의 수정을 통해 거의 완벽한 자막을 내놓고 있다.
이는 한국 네티즌들에게 미국 현지인과 거의 동일한 드라마 시청 시간대를 묶는 기회를 제공한 것은 물론, 공중파와 케이블 TV가 수입할 드라마를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최근 캐치온에서 방영하고 있는 '프리즌 브레이크'의 경우 이미 방영 전에 네티즌의 입소문으로 검증을 마쳤다는 점에서 '콘텐츠 주권'이 'TV→시청자'가 아닌 '네티즌→TV'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본보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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