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권혜림 기자] 배우 전종서는 운명을 믿는다고 했다. 어느 만남이나 선택에도 운명적인 기운이 깃들고, 연기에 막 발을 뗀 자신이 세계적 거장 감독의 영화에 덜컥 주인공으로 낙점된 것에도 그런 힘이 미쳤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가 영화 '버닝'에서 연기한 인물 해미는 고통 없이 이 세계에서 사라지길 바라는 여성이었다. 삶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어쩌면 너무 사랑한 끝에 소멸을 원하게 된듯도 보였다. 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원시 부족의 철학에 감화되고, 하루 한 번 운 좋게 만날 수 있는 방 안의 햇살을 사랑하는 그의 운명을 관객은 끝까지 통보받지 못한다.
전종서를 만나기 전과 후, 해미의 운명을 다르게 상상하게 됐다. 그가 자신의 일부를 녹여 연기한 인물이라면, 해미는 운명 앞에 무력한 인간인 동시에 그 무력함과 별개의 의지 역시 가진 사람일 것이다. 신인인 전종서는 관객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은 존재다. 너무 익숙치 않아서, 그리고 그 낯섦이 모호하고도 매혹적이어서, '버닝'의 해미와 배우 전종서라는 사람을 구별해 받아들이기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만 같았다.
18일(이하 현지시각) 제71회 칸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 칸의 해변 모처에서 경쟁부문 초청작 '버닝'(감독 이창동, 제작 파인하우스필름, 나우필름)의 이창동 감독과 배우 유아인, 스티븐연, 전종서가 참석한 가운데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버닝'은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 분)가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 분)를 만나고, 그녀에게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 분)을 소개 받으면서 벌어지는 비밀스럽고도 강렬한 이야기. 일본의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이다. 지난 16일 칸에서 첫 선을 보인 뒤 현지 언론의 호평을 받고 있다.
이날 인터뷰에서 전종서는 자신이 연기한 해미 역을 둘러싼 많은 해석과 추측들과 관련해 배우 자신이 생각한 인물은 어떤 캐릭터였는지에 대해 답했다. 그는 "(감독이) 이 캐릭터는 어떤 아이라고 정해 놓지 않았다고 했다"며 "연기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었고, 그게 어려울 수 있지만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창동 감독님은 어떤 행동과 표정도 허용해주고, 제가 그 캐릭터일 수 있게 환경을 제공해 줬어요. 놀이터가 굉장히 컸고 그 안에서 재밌게 촬영했어요.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게 만들어주셨고 그래서 의심이나 부담은 느껴지지 않았어요."
극 중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 감정이 대체로 명확하지 않다는 점은 국내 개봉해 관객을 만나고 있는 '버닝'의 논쟁점이 된다. 얼핏 단순해보이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배열하기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서사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는 인물을 연기한 배우에게도 종종 호기심을 일으켰다.
"저도 감독님께 왜 전부 모호하게 되어 있는지에 대해 여쭤봤는데, '그렇게 돌직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가 없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이 아이가 상대를 좋아하는 건가' '사라진 건가'처럼 일차원적으로 생각하면 답이 너무 많기도, 답이 없기도 해요. 그냥 느껴지는대로 그 순간 연기했던 것 같아요. 많은 생각을 하면 되려 잘 안 됐던 것 같아요. 물론 제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요.(웃음)"
'버닝'의 해미 역이 자신과 또래인 20대 관객들로부터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길 기대한다고도 말했다. 전종서는 "해미든 종수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라고 '버닝'을 설명했다.
"제가 20대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며 느낀 것들이 많이 투영된 것 같아요. 누구나 나이에 상관 없이 꿈꾸고 갈망하고 몽상하며 사는데, 거기서 느껴지는 것이 많잖아요. 마냥 행복한 것도 아니고요. 그런 면에서 있어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로는 종수가 해미를 찾아다니다 만난 나레이터 모델의 말,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를 꼽았다. 자신이 출연한 장면은 아니지만 유독 인상적으로 다가왔다는 것이 전종서의 설명이다. 가장 애정이 가는 장면으로는 역시 국내 시사와 칸 프리미어 이후 화제가 됐던 노을 장면을 언급했다. 벤, 종수와 대마초를 피우던 해미가 상의를 벗고 노을을 바라보며 춤을 주는 장면이다. 인물의 정서를 읽을 수 있는 장면인 동시에 미학적으로도 감탄을 자아낸 장면이기도 하다.
"그 장면이 너무 좋아요. (삶은) 행복하다가도 끝날 것 같은데, 노을도 그렇지 않나요? 미친듯이 아름답다 져 버리니까요. 그게 해미의 생각과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비록 약기운에 취해 추는 춤이지만 그런 각박한 상황에 놓여 인생을 살아가는 아이가 희망을 놓지 않고, 내가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에 대해 몸부림친 것 같아서요. 그게 추하지만 아름답고, 아름답지만 추한, 그런 복잡한 감정을 주는 것 같아요."
첫 번째 영화에서 이토록 강렬한 장면의 주인공이 됐다는 점은 행운이라 할 만하지만, 상반신을 노출한 채 마임을 바탕으로 춤을 추는 연기가 간단하지만은 않았을 법했다. 이에 대해 전종서는 "노출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았다"고 답했다.
"노출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이 영화는 우리가 사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 안에서 섹스와 담배 등 부담이라 생각하면 부담일 수 있는 요소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게 현실이잖아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드리는 과정의 일부였어요. 그래서 사실 부담이 크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비디오를 즐겨 빌려보며 영화와 가까워졌다는 전종서는 영화 '몽 루아'(감독 마이웬)와 같이 "감정이 징그러운" 영화들을 즐겨 본다고 답하기도 했다. 그는 "(감정이) 끝까지 내려가고, 사람들의 징그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들이다. '밀양'도 그 중 하나였고, '그것이 알고싶다'도 즐겨 본다"고 답했다.
"저라는 사람에게 징그러운 구석이 많아 그런 갈증이 나는 것 같아요. 저는 한 명과 대화해도 정말 감정의 밑까지 내려가는데, 그래야 대화를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 친구들 중에는 대화하는 것을 피곤해하는 사람도 있어요. '너와 이야기하면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것 같다'고도 하고요. 그게 저인 것 같아요. 생각이 없을 땐 또 너무아무 생각이 없지만요.(웃음)"
이창동의 '버닝'과 같이 거장 감독의 작가주의적 영화를 제외하면, 이런 전종서의 갈망을 채워 줄 배역이 등장하는 영화가 흔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한 고민은 없는지 묻자 "제가 (작품을) 고를 수 있는 상황은 전혀 아니다"라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뭔가 정해져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있어요. 이창동 감독님도 캐스팅할 때부터 '운명적 만남인 것 같다'고 이야기 하셨어요. 캐스팅이든, 누굴 만나는 일이든, 운명이 없지 않다고 생각해요. 제게 어떤 게 오든, 제가 고를 수 있는 건 전혀 아니지만, 제게 그런 복이 있는 것 같다고는 생각해요."
한편 제71회 칸국제영화제는 오는 19일 폐막식을 열고 수상작(자)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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