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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로 남은 송진우, 21년 프로선수 생활 "아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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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공식 기자회견 갖고 은퇴 소회 밝혀

한화 이글스의 '영원한 회장님' 송진우(43)가 이제 한국 프로야구의 전설로 남게 됐다.

이미 현역 은퇴 발표를 한 송진우는 21년간의 프로생활을 정리하는 은퇴 기자회견을 18일 오후 2시 대전 유성 리베라호텔에서 가졌다.

이 자리에서 송진우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고 자신에게도 만족한다. 은퇴는 새로운 시작으로 생각한다. 이제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 선수 때만큼 열심히 해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송진우는 "개인적으로는 3천 이닝 투구가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오랜 기간 동안 마운드에 서 있다보면 좋은 기록도 있고 나쁜 기록도 있겠지만 이닝을 많이 소화했다는 것은 그만큼 꾸준하게 마운드에서 공을 던졌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선배, 지도자에게 좋은 것을 많이 배웠다"고 덧붙였다.

계속해서 송진우는 "꾸준함으로 야구를 해온 것 같다. 계속 팬들에게 꾸준한 선수로 남고 싶으며, 노장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에도 많은 응원을 보내준 40대 중년분들로 인해 큰 힘이 됐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해준 한화팬들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은퇴의 변을 대신했다.

충북 증평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올해로 선수생활만 34년을 맞았던 송진우는 올 시즌 들어 구속이 130㎞대 초반으로 떨어지고 더 이상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에는 무리라는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구단 및 가족과 협의를 통해 결국 은퇴의 길을 밟게 됐다.

지난해 6월 6일 대전 히어로즈전에서 '2천 탈삼진'이란 새 이정표를 세우고 올 시즌 초반에는 역시 전인미답의 '3천 이닝' 투구라는 대기록을 세운 송진우의 야구인생을 돌아본다.

◆송진우의 '청년시대'

송진우는 청주 세광고 시절부터 뛰어난 좌완투수로 주목받았다. 고교 2년 때인 1982년에는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세광고에 우승컵을 안겼다.

이듬해인 1983년 고교 3년 때에는 부상을 입은 몸으로 대회 출전을 강행했다가 부상이 덧나 이후 동국대 3학년 때까지 제대로 선수생활을 하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한 강인한 정신력으로 부상을 이겨내고 1987년 대학 4학년 때 재기에 성공하면서 다시 한 번 야구팬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송진우의 동국대 시절 은사이기도 한 한화의 사령탑 김인식 감독은 "(송)진우 공은 대학 시절에도 참 좋았다. 특히 대학 졸업 무렵에는 공이 정말 묵직했다"며 당시를 떠올리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8년 프로에 입단해야 했지만 당시 서울올림픽에 출전시키기 위한 대한야구협회의 지시로 인해 송진우는 한 해 늦게 프로에 입단했다.(당시에는 올림픽에 프로 선수가 출전할 수 없었다)

1989년 빙그레(한화의 전신)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송진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팀을 옮기지 않았다. 이른바 한화의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인 것이다.

20대의 송진우는 대포알같은 강속구를 자랑했다. 1990년대 초반 빙그레 시절에는 직구 구속이 145km를 웃도는 좌완 정통파 투수로 맹활약했다.

송진우는 데뷔전을 완봉승으로 장식하며 화려하게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입단 첫 해 9승10패, 9세이브, 평균자책 2.81을 기록하며 단번에 팀의 기둥투수로 떠올랐다. 다음해인 1990년에는 11승7패, 27세이브, 평균자책 1.82라는 빼어난 성적으로 본격적인 '송진우 시대'를 알렸다.

당시만 하더라도 국내 프로야구는 현재와 같은 선발투수-중간계투-마무리의 분업화 체계가 잡히지 않은 시절이다. 감독이 나가라면 어느 때고 마운드에 올라 공을 뿌렸던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송진우는 프로 4년차였던 1992년에는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경기에 출전해 다승왕(19승)과 구원왕(25 세이브포인트)을 동시에 차지하는 좀처럼 나오기 힘든 진기록까지 갖고 있다.

이후 송진우는 잦은 등판의 후유증으로 인해 1996년 15승을 거둔 이후 1997, 1998년에는 각각 6승밖에 올리지 못하며 침체에 빠져 은퇴 얘기마저 나돌았다.

◆'불굴의 의지', 전설로 거듭난 송진우

1998년 시즌이 끝난 뒤 주변에서는 은퇴와 코치 권유도 있었으나 송진우는 "아직은 물러날 때가 아니다"라며 또 한 번의 도전 정신을 보였다.

송진우는 떨어진 구속을 타자 분석과 구질의 변화로 극복하며 다음해인 1999년 15승5패, 6세이브를 올리며 완벽하게 재기에 성공한 모습을 보였다. 이 때부터 송진우는 '강속구' 투수가 아닌 '기교파' 투수로 탈바꿈했다.

지난 2003년엔 시즌이 거의 끝나갈 무렵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팔꿈치 수술까지 받으며 선수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의욕을 드러냈다.

프로 입단 때만 해도 역시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후배 임선동과 조성민 등이 부상을 입으며 기교파 투수로의 변신에 실패한 것에 비춰 보면, 송진우가 21년 동안 프로무대 마운드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재능보다 앞선 것이 철저한 노력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야구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송진우와 선수 시절부터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던 이상군 한화 2군 투수코치는 "송진우 선수는 몸관리를 잘 해 선수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었던 데다 승부근성이 있어서 대기록도 계속 수립할 수 있었다. 목표 의식을 확실하게 갖고 이를 추진해갔던 송진우의 노력을 후배 선수들도 많이 배웠으면 한다"며 선수 유니폼을 벗게 된 송진우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은 이제 마운드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지만 '송진우'라는 이름은 한국 프로야구사에 영원히 새겨지게 된 2009년 8월 18일이다.

조이뉴스24 문현구기자 brando@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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