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두산 베어스는 프로야구 원년부터 모기업이 바뀌지 않은 3개팀(두산·삼성·롯데) 중 하나다. 35년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 구단으로 그룹의 야구 사랑은 유별날 정도로 유명하다. 이번 한국시리즈에서도 박정원 그룹 회장을 비롯해 박지원 부회장 등 주요 임원들이 전경기를 빠짐없이 지켜봤다. 두산은 야구를 빼고 말할 수 없는 회사다. 정확히 80년 전 그룹의 효시인 '박승직상점' 때부터 새겨진 야구 DNA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산 그룹과 야구의 남다른 인연을 소개한다.
◆박승직상점
동대문 두산타워 33층. 그룹 비서실 입구에 '박승직상점(朴承稷商店)'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896년 8월 서울 종로에서 박승직(박용곤 명예회장의 조부)이 창업한 곳으로 두산그룹의 효시다. 박승직은 보부상으로 사업을 시작해 현대적 개념의 회사를 차린 전설적 인물이다. 그는 '수분가화(守分家和, 자신의 분수를 지켜야 가정이 화목하다)'라는 가훈과 성실(誠實), 인화(人和)를 평생 신조로 삼아왔다. 지금도 성실과 인화는 두산그룹을 상징하는 표어다.
이후 그의 아들 박두병(朴斗秉)이 1953년 6월 두산산업(주)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초대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1952년 5월 동양맥주를 정부로부터 인가받아 민간기업으로 발족시켜 OB맥주를 시판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상징이 된 '치맥문화'의 기틀을 마련한 셈이다. 기술소재사업 뿐만 아니라 정보유통사업, 생활문화사업에 이르기까지 급속한 성장을 하였다. 또한 합동통신사를 인수, 언론계에도 공헌했다.
◆최초의 사회인 야구
1936년 4월 박두병은 상무 취임과 동시에 박승직상점을 근대화된 기업체로 변신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4년간의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 생활과 3개월의 견습업무를 거쳐 가족회사에 입사한 그는 제도적인 측면에서 회사를 바꿔나갔다. 당시 직원은 도매부 20여명, 소매부 10여명이었는데, 출근부 작성, 상여급 차등지급, 여직원 다수 배치 등 당시로선 획기적인 조치를 잇달아 내놓았다.
이와 함께 박두병은 직원들의 복리후생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건강 증진과 직원 상호 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야구부와 탁구부 등 운동부를 결성, 직물상 간 경기를 개최했다. 그저 방망이로 공을 치는 수준이 아닌, 유니폼을 제대로 갖춰 입고 정식 룰에 따라 치러진 야구경기였다. 직원들간 단합을 증진하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큰 효과를 봤다고 한다. 오늘날 사회인 야구의 원조 격인 셈이다. 두산이 프로야구단을 창단하기 46년 전의 일이다.
◆프로야구 참가
1980년대 초가 되자 정부 주도로 프로야구 창설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두산(당시 OB)은 프로 원년 대전을 연고로 했는데, 사연이 있다. 1981년 당시 프로야구 참가자격 기업선정을 살펴보면 ▲재무구조가 튼튼한 대기업을 총수의 출신 지역별로 선정하되 ▲가급적 경쟁상대인 같은 업종을 피하도록 했으며 ▲전체 그룹의 종업원 수가 3만 명 이상인 대기업체 우선에 ▲프로야구 발전에 관심과 성의가 있어야 한다는 4가지 큰 틀이 기준이었다.
그런데 대전을 연고로 하는 기업 물색이 쉽지 않았다. 프로야구 창단 실무 관계자들은 1960년대 실업야구팀을 유지했던 동아그룹의 계열사인 대한통운과 교섭을 벌였지만 최원석 당시 동아그룹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탁구협회장을 맡고 있던 그는 88 서울올림픽에서 탁구 금메달을 따는데 매진하겠다며 고사했다. 차선책으로 접촉한 기업은 한국화약(한화)이었다. 한국화약그룹 창업주 김종희는 천안 북일고 야구팀을 창단하면서 야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학생야구에 전념하겠다며 역시 거절했다.
이 때 동참 의사를 나타낸 곳이 두산이다. 박용곤 두산 회장은 미국 워싱턴대학 유학시절 미국사회에서 프로야구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잘 이해하고 있던 인물이다. 부친 박두병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무엇보다 야구광이었다. 두산은 이런 이유로 프로야구에 적극적이었다. 1982년 1월 15일 김영덕 감독, 김성근, 이광환 코치와 선수 25명으로 OB 베어스 야구단을 창단했다. 국내 프로야구팀 최초로 창단식을 가진 팀이 바로 베어스다. 박철순의 24승과 김유동의 한국시리즈 만루홈런으로 기억되는 원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두산은 이후 프로야구의 명문구단 중 하나로 도약한다.
◆떡잎부터 달랐던 김태형
지난해 두산 사령탑 부임 후 한국시리즈 2연패를 이뤄낸 김태형 감독은 유쾌한 사람이다. 신일고, 단국대를 거쳐 1990년 OB 베어스에 입단한 그는 1980년대를 주름잡던 OB 베어스의 주전포수 김경문(현 NC 다이노스 감독)과 조범현(전 kt 위즈감독)의 뒤를 이어 김인식 감독 아래에서 수비형 포수로 입지를 구축했다. 동료 포수들인 이도형, 박현영 등과 호흡을 맞춰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국가대표 출신 포수 유망주 최기문, 진갑용, 홍성흔이 연달아 입단하면서 2001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수비형 포수라고는 하지만 선배인 김경문, 조범현보다는 현역 시절 타격이 좋았다. 가볍게 툭툭 밀어치는 타격은 상대팀의 약을 올릴 만큼 인상적이었다.
김태형의 지도자로서의 진면목을 발견한 때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었다. 당시 대표팀 김경문 감독을 수비 김광수, 투수 선동열, 타격 김기태 코치 등이 덕아웃에서 보좌했는데, 김태형은 벤치 밖 배터리 코치로 합류했다.
당시의 김태형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친화력과 운동 분위기 조성 능력이 너무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올림픽을 대비한 오키나와 전지훈련과 대만 예선전 기간 동안 그는 긴장한 선수들을 다독거리며 유쾌한 연습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냈다. 야구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교제능력과 친근한 환경 만들기에 달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 야구팀의 금메달 획득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김태형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공헌 또한 무척 컸다. 두산이 최근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중요한 이유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조희준은 20년 이상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야구행정을 다루며 프로야구의 성장과정을 직접 지켜봤다. 국제관계 전문가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출범 당시 한국 측 협상단 대표로 산파 역할을 맡았다.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문학부 출신으로 일본 야구에 조예가 깊은 그는 ▲KBO 운영부장 및 국제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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