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일본 햄 시장에서 니혼햄이 돌풍을 일으켰다. 수많은 업체가 난립한 햄 시장에서 점유율 1위로 올라선 니혼햄은 이후 시장 지배자의 위치를 내놓지 않았다. 1973년 11월 니혼햄이 도쿄 연고의 프로야구팀 닛타쿠(日拓) 플라이어즈를 인수해 니혼햄 파이터스로 명칭을 바꾼 뒤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좋은 일은 거기까지.
1945년 11월 창단한 71년 역사의 구단이지만 일본시리즈 우승은 2차례에 불과하다. 오랫동안 일본 수도 도쿄를 연고로 하면서도 인기와 성적이 바닥이었다. 2004년 삿포로로 이사한 뒤 강팀으로 변신한 니혼햄은 창단 후 3번째 일본 정상을 노리며 오는 22일부터 히로시마 카프와 일본시리즈를 시작한다. 우리에게는 다르빗슈 유와 오타니 쇼헤이로 각인된 니혼햄의 역사를 소개한다.
◆야구판에 뛰어든 영화사
태평양전쟁이 막 끝난 1945년 11월 6일. 세네터즈(Senators, 세네터즈 야구협회) 야구단이 창단돼 일본야구연맹에 가입했다. 메이저리그 워싱턴 세네터스의 팀명을 본 딴 이 구단은 그러나 심각한 재정난으로 1년 만에 철도회사 도큐(東急)에 매각된다. 재정난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돈줄이 말라붙자 1954년 1월 1일 도큐는 신생 영화제작사 도에이(東映)에 구단운영을 위탁한다. '도에이 플라이어스'의 탄생이다. 도에이는 극장용 영화 제작 및 배급, 그리고 외화 수입, TV 드라마 제작 등이 주 사업이다.
특히 애니메이션 사업이 유명한데, 산하 도에이 애니메이션에선 드래곤볼, 슬램덩크, 은하철도999 등 유명 만화영화를 다수 제작했다. 도에이가 프로구단을 소유한 최초의 영화사는 아니다. 일본프로야구 원년 멤버인 쇼치쿠(松竹) 로빈스는 영화사를 모기업으로 두고 1936년부터 1952년까지 17 시즌 동안 센트럴리그에 참여했다. 1950년 센트럴리그 구단으로선 양대리그 체제에서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 팀은 이후 다이요(大洋)로 합병됐는데, 바로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전신이다.
◆'전환점' 장훈의 입단
도쿄를 연고로 한 도에이는 그러나 존재감이 없다시피했다. 같은 연고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위세에 눌려 도쿄팬들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구단 창설 이후 성적과 인기가 모두 바닥을 기었다. 1959년 전환점이 찾아왔다. 훗날 '안타 제조기'로 명성을 떨친 장훈이 입단하면서 A클래스(리그 3위 이상의 성적)에 첫 진입한다. 이 해에 장훈은 신인왕을 차지한 뒤 오랫동안 팀 타선을 이끌었는데, '도에이의 장훈', '장훈의 도에이'로 불릴 정도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왼손 강타자 김기태(현 KIA 타이거즈 감독) 홀로 분투하던 1990년대 쌍방울 레이더스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된다. 이후 일본 야구를 평정하며 타격에 관한한 '신의 경지'에 도달한 장훈은 통산 3천85안타 504홈런 319도루라는 전무후무한 성적을 올렸다. 교타자로는 이치로 스즈키(마이애미 말린스) 정도가 그와 비교되지만 장타력까지 감안하면 그만한 타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500홈런 300도루를 달성한 일본 야구 선수는 장훈 뿐이다. 장훈은 1975년 시즌을 마친 뒤 '부유한 옆집' 요미우리로 이적할 때까지 '도에이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KBO리그 원년 타격왕 백인천도 1962∼74년 도에이에서 활약했다. 1975년 태평양클럽 라이온즈로 이적해 수위타자에 오른 그는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자 MBC 청룡의 선수 겸 감독을 맡아 전무후무한 타율 4할1푼2리(80경기)를 기록했다. 이후 LG 트윈스,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을 역임했고, 1990년에는 LG 트윈스에서 첫 우승을 맛봤다.
◆굴욕의 도쿄
1973년 1월 도에이는 닛타쿠(日拓) 홈 플라이어즈로 1년간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3년 11월 19일 니혼햄으로 또 다시 매각된다. 니혼햄 파이터즈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출발했지만 결과는 동일했다. 니혼햄은 전·후기 최하위라는 최악의 성적에 그쳤다. 간판스타 장훈이 7번째 타격왕(0.340) 타이틀을 획득한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오랫동안 침체기를 겪던 이 팀은 1981년 전반기를 4위로 마친 뒤 후반기에 깜짝 우승을 차지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롯데 오리온즈를 3승1패1무로 제치고 19년 만에 퍼시픽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어 일본시리즈에서는 같은 도쿄 고라쿠엔구장을 사용하는 '한 지붕 두 가족' 요미우리와 맞붙었지만 2승4패로 무릎을 꿇었다. 일본 야구 사상 첫 동일구장에서 치러진 '덕아웃 시리즈'였다.
1988년 도쿄돔이 개장한 뒤에도 니혼햄은 요미우리와 두 집 살림을 이어갔다. 도쿄돔이 문을 열자 인기 구단 요미우리의 홈경기 입장권은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지만 니혼햄 홈경기 때는 좌석이 텅텅 비었다. 오죽했으면 "도쿄돔 구경을 가려면 니혼햄 입장권을 사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을까. 같은 연고지, 같은 구장을 사용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두 구단은 성적과 인기 모두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영광의 삿포로
니혼햄은 오랫동안 정든, 그러나 마가 낀 듯한 도쿄를 떠나 2004 시즌부터 머나먼 '북쪽 나라' 삿포로로 연고지를 옮겼다. 신축된 삿포로돔에 새 터를 잡았다. 그리고 선수단 체질 개선을 통한 전력 강화에 성공하면서 일본 야구의 무시 못할 강호로 재탄생했다. 2006년 25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일본시리즈에서도 주니치 드래곤스를 4승1패로 제압하고 우승 샴페인을 터뜨렸다.
1962년 도에이 시절 이후 44년 만의 감격적인 우승이었다. 일본의 변방 홋카이도(北海道)에서 일본챔피언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10년 만인 올해 또 한 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위해 결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상대인 히로시마 역시 오랫동안 돈문제로 허덕이던 가난한 구단이다. 어떤 팀이 우승하든 전통적인 '일본 큰 손'들을 제쳤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를 듯하다.
◆'대학교수' 구리야마 올 시즌 니혼햄을 7번째 리그 우승으로 인도한 구리야마 히데키(栗山英樹) 감독은 1961년 도쿄에서 태어났다. 야구를 좋아하는 형의 권유로 소년연식야구를 시작해 중학교 시절에는 배구선수로 활약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야구를 다시 시작해 3학년 때 주장 겸 투수를 맡았다. 졸업 후 교사가 될 생각으로 국립대학인 도쿄학예대학(東京学芸大学) 교육학부에 진학했다. 학업에 열중하면서 다시 야구부 활동을 시작, 투수와 내야수로 뛰면서 주경야독했다. 입단테스트를 거쳐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육성선수로 입단한 뒤 외야수로 7시즌 동안 뛰었다. 통산 타율은 2할7푼9리. 이후 야구해설과 대학교수 생활을 하던 중 2012년 니혼햄의 감독 제의를 받았다. 감독 부임 첫 해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일본시리즈에선 '역사적 라이벌' 요미우리에 아쉽게 패했다. 국립대학 출신으로 대학교수 경력을 가진 감독은 일본프로야구에서 구리야마가 처음이다. 독신으로 취미는 야구장비 모으기. 그가 수집한 야구장비는 집 한 채 분량이라고 한다. |
조희준은 20년 이상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야구행정을 다루며 프로야구의 성장과정을 직접 지켜봤다. 국제관계 전문가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출범 당시 한국 측 협상단 대표로 산파 역할을 맡았다.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문학부 출신으로 일본 야구에 조예가 깊은 그는 ▲KBO 운영부장 및 국제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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