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야구밥'을 먹다 보면 정작 야구에는 둔감해지는 경향이 있다. 특히 야구 행정을 다루다 보면 야구 경기에 대한 관심은 일반 팬보다도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오랜 시간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선수는 있었다. '불세출의 스타' 선동열도 그 중 하나다. 선동열의 이름을 떠올릴 때면 1999년 11월이 자연스럽게 생각난다. 당시 일본에선 한국과 일본의 프로 올스타들이 맞붙는 제3회 '한·일 슈퍼게임'이 일본 각 지역을 순회하며 거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999년 후쿠오카 3자회동
당시 한국 선발팀은 나고야돔(2-5 패)과 나가라가와(3-5 패) 경기를 마치고 규슈 지역으로 이동했다. 2연패 중인 한국선수단은 무거운 몸을 이끌며 어두운 표정으로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당시 대표팀 업무를 담당하던 필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이토 오사무 주니치 드래곤스 사장이었다. 의외의 연락이었는데, 아마 이토 사장의 한국인 인맥에 필자도 들어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용건은 간단했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 J모 사장과 미팅을 잡아 놓았는데, 양국 야구 사정에 밝으며 통역도 담당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설픈 일본어 구사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 동석하게 되었다. 다른 아무도 없는, 세 사람만의 대화였다.
심각한 자리였다. 선동열의 거취를 둘러싼 논의가 핵심이었다. 얘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1995년 선동열의 주니치 입단은 선수임대 형식이었다. 외부적으로는 한·일 협정에 의거한 해태에서 주니치로의 이적이지만, 구단의 경영상태가 어려웠던 해태로서는 선동열을 주니치에 임대해 준 것으로 해석했다. 임대료를 받고 선동열을 빌려줬을 뿐 보류권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에서 선동열 일본 진출 이전 주니치의 사정을 살펴보자. 1988년 센트럴리그 우승 이후 성적이 변변치 못했다. 특히 마무리 투수 부재로 경기 때마다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역전패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했다. 주니치는 믿음직한 마무리 투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해태의 사정으로 주니치는 물론이고 일본 최고 명문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까지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을 통해 선동열 영입에 혈안이 돼 있었다.
결론적으로는 선동열의 주니치 입단으로 일은 일단락이 됐다. '뒷문'이 강해진 주니치는 4년이 지난 1999년 센트럴리그 우승을 거머쥐며 숙원을 이뤘다. 비록 다이에 호크스(현 소프트뱅크)에 1승4패해 일본시리즈 우승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성과는 뚜렷했다.
◆'지한파' 이토 오사무
이토 오사무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주니치신문 사업국장 시절 북경에서 마라톤대회를 개최해 중국과 일본의 스포츠 교류를 진흥시켰다. 이를 계기로 중국과 일본의 친밀한 관계정립을 세운 인물 중 한 명이자 지한파로서 한국 내 인맥도 두터운 편이었다. 주니치 구단대표(당시는 구단대표 보좌역) 직을 맡으며 유독 해태의 선동열을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 선동열의 주니치 입단에 여러 사람들의 협조와 협력이 있었지만 이토 대표의 업무처리를 잊어서는 안될 만큼 영향이 컸다. 그만큼 선동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얘기를 후쿠오카로 돌리면, 시내 호텔에서 해태 J 사장과 주니치 이토 대표 그리고 필자 세 사람이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 시기는 선동열의 주니치 임대기간이 종료되는 예민한 시기였다. 국내는 물론 일본 언론도 무척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선동열은 전성기가 살짝 지나 있었지만 마무리 투수로서는 아직도 건재한 상태였다.
해태와 주니치는 일단 선동열의 임대 연장에 의견 일치를 봤다. 그러나 수반되는 임대료의 문제로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말았다. 약 한 시간에 걸쳐 진행된 회의는 결국 결렬됐다. 결과적으로 '선수 선동열'의 끝을 보게 된 미팅이었다.
선동열 본인과 무관하게 진행된 그의 거취 문제. 그러나 뒤늦게 확인한 바에 따르면 선동열 자신은 이미 은퇴를 결심하고 있었다. 최근 선동열 본인으로부터 당시 얘기를 직접 들었다. 일본에서 4시즌을 뛴 그는 등판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왼쪽 무릎과 오른쪽 허벅지에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슴 한 구석에는 정상에 있을 때 그만두어야 된다는 선배들의 조언을 새기던 상황이었다. 즉 본인은 한국 및 일본 구단간 담판이 어떻게 결론이 나든 유니폼을 벗을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동열의 상징' 1820
결국 선동열은 명예롭게 주니치 퇴단을 선택했다. 주니치 구단은 그를 '종신명예선수'로 예우했고, 이듬해 은퇴경기도 마련해줬다. 길진 않아도 그간의 헌신적인 공헌에 최대한 성의를 표하며 구단의 '전설적 존재 중 하나'로 인정해준 것이다.
이후 선동열은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야구위원회(KBO) 홍보위원으로 활동했다. 프로야구를 국민스포츠로 정착시키는데 힘썼고, 지도자로 변신해서는 삼성 라이온즈 및 KIA 타이거즈 감독을 역임했다. 비록 지금은 야인에 불과하지만 한일 양국 야구계에서 워낙 뚜렷한 위상을 세운 인물인 만큼 언젠가는 다시 야구계에서 큰 역할을 맡아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선동열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숫자가 하나 있다. 그가 KBO 홍보위원으로 임명됐을 때다. 당시 KBO 총무부에 근무하던 필자는 그의 급여통장을 우선 만들어야 했다. 야구회관 1층 농협에서 통장을 개설하면서 비밀번호가 필요했다. 선동열을 상징하면서도 쉽게 기억할 수 있는 숫자의 조합, 어렵지 않았다. 개설된 통장을 선 위원에게 전달하면서 비밀번호의 힌트를 줬다. "해태와 주니치를 합쳤어요."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해지된 지 오래 된 이 통장의 비번은 이랬다. '1820'. 선동열이 해태와 주니치에서 달았던 자랑스런 등번호 조합이었다.
조희준은 20년 이상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야구행정을 다루며 프로야구의 성장과정을 직접 지켜봤다. 국제관계 전문가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출범 당시 한국 측 협상단 대표로 산파 역할을 맡았다.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문학부 출신으로 일본 야구에 조예가 깊은 그는 ▲KBO 운영부장 및 국제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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