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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준의 이런 야구]콜라먹고 취한 '소년' 김성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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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불운의 일본 생활…역경 뚫고 '승부사'로 거듭나다

김성근은 논란의 대상이다. 그는 긍정과 부정을 공유하는 지도자다. '강팀 제조기, 선수 혹사, 경기 시간 끌기' 등의 표현이 항상 그 앞에 따라붙는다. 김성근은 성공한 지도자다. 재일동포 출신으로 국내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뒀다. 역대 국내 프로야구 지도자들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다. 무려 7개 구단 지휘봉을 잡은 경력이 말해준다. 김성근은 뉴스메이커다. 좋든 싫든 그만큼 화제와 이슈를 끌어모으는 지도자는 흔치 않다. 사람의 성정은 성장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냉혹한 지도자, 김성근의 성장기 얘기는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날의 김성근을 만든 그의 일본 시절 얘기를 소개한다.

◆가난의 굴레

오사카(大阪)와 가까운 문화재의 도시인 교토(京都)에서 김성근은 1942년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넉넉하지 않은 가정이었다. 게다가 김성근이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자택 근처에서 전철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어려웠던 생활은 더욱 빈곤해 졌다. 큰 누나는 결혼해서 한국에서 살고 있었는데 한국전쟁 중 남편과 사별한 뒤 아이를 품에 안고 고향에 와 있었다. 집안 경제력은 형님들과 둘째 누나가 책임지고 있었다. '야구 소년' 김성근은 교토의 헤이안(平安)고교 진학을 동경했다.

헤이안고는 일본 전체에서도 이름난 야구명문이었다. 그러나 어려운 집안 사정 탓에 사립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김성근은 집에서 가까운 공립학교 '가츠라(桂)고교'에 진학한다. 어린 나이였지만 학비 전액을 스스로 벌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우유배달을 한 후 등교했고, 수업이 끝난 뒤에는 야구부 훈련을 소화했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쉬지 않았다. 매일 가츠라가와(桂川) 둑을 따라 달리며 체력을 길렀다. 겨울방학 때는 토목공사, 백화점 물건배달 등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비와 야구를 위해 돈을 벌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허무했던 고교 시절

일본의 고등학교 야구사정을 살펴보자. 아사히신문이 1915년 '전국중등학교우승야구대회'로 개최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유명한 전국대회가 있다. 바로 '여름 고시엔(甲子園)대회(8월 중순 개최)'다. 또 하나의 대회는 1924년 마이니치신문이 '춘계선발중등학교야구대회'로 시작한 일명 '봄 선발대회(3월 중순 개최)'다. 일본 문부성(우리의 교육부에 해당)이 인가한 고등학교는 거의 야구부를 두고 있다. 정식 야구부가 없으면 취미로 하는 야구팀은 반드시 있다.

필자는 80년대 유학(遊學)시절 도쿄 소재 중학교에서 국어 과목 교생실습을 한 적이 있다. 학생들은 자유로웠고, 방과 후 또는 특별활동 시간을 활용해 야구 등 스포츠를 즐기며 면학에 힘쓰고 있었다. 요즘은 우리도 많이 좋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일본은 여러모로 부러운 나라였다. 가츠라고는 김성근 졸업 후인 1975년 여름 고시엔에 출전한 적이 있다. 하지만 김성근 재학 시에는 본선대회 출전 문턱에서 매번 탈락했다. 1958년 1루수 겸 투수, 3번 타자로 출전한 2학년 여름 대회 예선 3회전에선 '야마시로(山城)고'에 5-6으로 9회 역전패해 탈락했다. 3번 타자이자 1루수로 출전한 3학년 여름 대회 예선 2회전에서도 '슈자쿠(朱雀)고교'에 2안타로 눌리며 0 -1로 패했다.

이 패배 이후 가을지방대회에 야구부원이 부족해 다른 운동부 선수를 빌려와 경기를 치르는 일도 빈번히 발생했다. 이것으로 김성근의 고교 야구생활은 끝나는 듯했다. 이 때 행운이 따랐다. 1959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의 일원으로 선발돼 처음으로 고국인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재일교포 선수단은 아이치(愛知)현의 도호(東邦), 주쿄(中京)상고, 오사카(大阪)의 나니와(浪華)상고 등 야구 명문고 재학생이 주축이었다. 선수단 면모가 무척 화려했다. 8월 7일부터 30일까지 거행된 여러 팀들과의 경기에서 재일동포 선발팀은 14승 1무 2패로 압도적인 전적을 남겼다.

◆고국서 처음 맛 본 오무라이스와 코카콜라

2010년 한국시리즈 1차전이 거행되던 날 필자는 인천문학구장 SK구단 감독실을 찾았다. 거사를 앞둔 김성근 감독의 긴장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감독실이 아닌 트레이닝 룸에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큰 경기를 앞두고 꽤나 불안해 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 듯했다. 마음의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김성근은 조국을 처음 방문한 1959년을 회상하며 이런 말을 했다. 김포공항에 내리자 서울의 날씨는 상당히 더웠다고 한다. 김성근을 포함한 선수단은 지프를 타고 서울 시내 카퍼레이드를 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6년이 지났으나 전쟁의 흔적은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식량사정이 어려웠던 시대였지만 주최 측은 재일동포 선수들에게 좋은 음식을 대접했다. 가장 맛있는 건 오무라이스였다. 오무라이스는 오사카에서 시작된 요리라고 하는데, '가난한 소년' 김성근은 고향이 아닌 고국에서 오무라이스를 처음 맛본 것이다. 당시 제공된 오무라이스의 맛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다고 지금도 그는 단언한다. 코카콜라도 한국에서 처음으로 마셔봤다. 너무 맛있는 음료여서 마시고 취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콜라가 일반인을 상대로 1957년부터 판매됐는데, 콜라를 처음 접한 김성근은 취할 때까지 그 검은 탄산음료를 계속 들이킨 것이다.

융숭한 대접을 받고 조국방문을 마친 그는 새로운 자부심이 생겼다. 학교에 가서도 한국인이라는 열등감이 사라졌다. 그 전에는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등교 전에는 김치를 먹지 않았지만 오히려 일본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올 만큼 자긍심이 커졌다. 조국의 따뜻한 정을 체험한 김성근은 고교 졸업 후 부산의 동아대학교에서 약 1년간 유학한다. 유학을 마친 뒤 투수로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1961년 봄 난카이(南海) 호크스(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전신) 스프링캠프에 테스트생으로 참가한다.

◆아쉬운 기억…난카이 호크스(南海 Hawks)

김성근이 난카이 캠프에 참가한 것은 재일 대한야구협회 최태환의 권유 때문이었다. 최태환은 오사카 난바(難波)역 옆 오사카구장 근처에서 세탁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런 관계로 난카이구단 관계자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최태환의 소개로 사카이시 나카모즈에서 펼쳐진 난카이의 스프링캠프에 참가한다. 당시 명장 쓰루오카(鶴岡) 감독 지도 하에 황금시기(59년 일본시리즈 우승, 61년 퍼시픽리그 우승)를 구가하던 난카이 선수들과 김성근의 실력 차는 역력했다. 당시까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혼자 공을 던져 왔는데, 프로 선수들의 연습만 지켜봐도 큰 공부가 됐다.

테스트를 위해 불펜에 선 김성근은 스기우라(杉浦)투수 옆에서 피칭을 했지만 긴장한 탓인지 공이 뻗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는 유즈키(柚木) 투수코치로부터 팔을 내미는 법부터 배웠다. 당시 최태환의 친척이 오사카구장 근처에서 권투도장을 하고 있었다. 김성근은 낮에는 나카모즈에서 야구연습을 하고 밤에는 도장에서 체력을 단련했다. 이렇게 투수에게 필요한 기초체력을 길렀다. 쓰루오카 감독은 시즌을 대비한 체력훈련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난카이는 그래서 캠프기간 중 '살인 트레이너'로 불리는 마쓰바(松葉)를 초청했다. 요즘은 모든 팀에 트레이닝코치가 있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마쓰바는 복근, 등근육 등 기초 트레이닝을 반복적으로 지속하는 이른바 '마쓰바식 체조'로 선수들을 단련시켰다. 김성근도 이 체조를 통해 철저히 체력을 키웠다.

이 시기 난카이에는 김성근과 함께 한국야구에 족적을 남긴 김영덕(金永德,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빙그레 이글스 감독 역임)이 투수로 활약하고 있었다. 김성근과 김영덕은 지도자가 된 뒤 한국프로야구에 '마쓰바식 체조'를 도입해 획기적인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약 20일간 난카이캠프에서 얻은 것은 많았지만 정작 프로 입단은 불가능했다. 이후 몇몇 사회인 야구팀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실력으로는 합격점이었지만 당시 도시대항야구에 출전하는 대기업들은 재일 한국인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입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냉혹한 환경이 만든 '승부사' 김성근

어려운 상황에서 겨우 취직을 했다. 교토의 상호차량(相互車輛)이라는 회사였다. 김성근이 입사한 해에, 이 회사 야구부는 교토 사회인대회에서 준우승, 긴키(近畿)대회에서 준우승의 성적을 올렸다. 그러나 훈련상황은 열악 그 자체였다. 점심시간 도중 작업복을 입고 캐치볼을 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했다. 다른 직원들이 야근할 때 김성근은 혼자 빠져나와 모교인 가쓰라고에서 개인 훈련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국 실업팀 교통부 야구단에서 러브콜이 왔다. 김성근에게 손짓을 한 사람은 재일동포 학생야구단 일원으로 김성근과 함께 모국을 방문했던 선배 배수찬이었다. 결국 김성근은 영구귀국을 결심했고 교통부에 이어 기업은행에서 투수로 명성을 날렸다. 이후 충암고, 신일고에서 젊은 감독으로 고교야구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신생팀을 강팀으로 만드는 수완은 이때부터 발휘됐다. 1982년 프로야구가 개막하자 그는 지도자로 꽃을 피웠다. OB베어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LG 트윈스, 쌍방울 레이더스, SK 와이번스의 감독을 거쳐 현재 한화 이글스의 덕아웃을 지키고 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그가 가난에 좌절해 야구의 꿈을 버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가 어린 시절 남부러울 것 없이 유복하게 자랐다면 오늘날의 김성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쩌면 '승부사' 김성근은 고향 교토의 냉혹한 환경이 만든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그를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다. 그의 야구에 환호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경멸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어린 시절 야구에 대한 집념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그에게 가난과 어려움은 장벽이 되지 못했다. 우유배달, 공사장 막노동, 맥 빠졌던 고교시절, 프로 입단 좌절…. '좌절과 고난의 역사'로 요약되는 그의 성장기야말로 오늘날 '성공한 야구인' 김성근이 있게 된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조희준

조희준은 20년 이상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야구행정을 다루며 프로야구의 성장과정을 직접 지켜봤다. 국제관계 전문가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출범 당시 한국 측 협상단 대표로 산파 역할을 맡았다.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문학부 출신으로 일본 야구에 조예가 깊은 그는 ▲KBO 운영부장 및 국제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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