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듸오 데이즈'로 2년 만에 주연으로 돌아온 류승범을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오락프로에서 보여줬던 이미지와 달리 인터뷰 내내 그는 매우 진중한 모습으로 삶에 대해, 영화에 대해,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물 흐르듯 진솔하게 얘기해 나갔다.
그런 모습을 낯설어하자, 류승범은 "당신이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은 때때로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일 때가 있다"며 자신도 그런 허상과 진짜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고민할 때가 많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겸손과 같은 인간이 갖춰야할 덕목을 가진 배우가 되고 싶다고, 인간 류승범과 배우 류승범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만큼 인간 류승범의 상태가 좋아야 보다 깊은 연기가 나오는 거 아니겠냐고 차분히 털어놓았다.
-영화 '사생결단' 이후 오랜 만에 이런 자리를 가지는 것 같다. 간만에 바빠서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신나기도 할 것 같은데.
"신나기보다 얼떨떨하다. 다시 관객들 앞에 서려니 긴장도 되고. 최근 '우생순'의 선전으로 한국 영화가 다시 살아나는 분위기에 영화를 들고 나와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번 영화가 전작에 비해 덜 무겁고, 출연진 모두가 거의 비슷한 비중이라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을 것 같다.
"이번 영화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가 아니라 상황극이라 아무래도 마음이 가벼운 것이 사실이다. 내용도 편하고 따뜻하고, 워밍업을 하는 심정으로 출연했다."
-최근 1930년대 배경의 영화가 많이 제작되고 있다.
"1930년대라는 시대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우리 영화의 경우 최초의 방송국에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그리다 보니 그 시대가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일제 치하라는 역사적 상황도 우리 이야기에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안다.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보면 남자들의 의상이 참 멋지다. 개인적으로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참 신났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상류층 의상을 보면 참 멋지다.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찰리 채플린이라든지 그 시대 인물들의 의상을 많이 연구했는데, 그 시대 옷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사람이 옷에 파묻혀 있는 느낌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몸에 착 감기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참 멋있다. 격이 있고, 낭만이 있는 것이..."
-그러고 보면 배우라는 직업이 참 매력이 있는 것 같다. 배우가 아니라면 그 시대 인물을 어떻게 살아보겠나? 본인은 배우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다양한 인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도 배우라는 직업의 매력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소통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 더 매력으로 다가온다. 활자로 돼 있는 한 줄을 표현하기 위해 배우들은 참 많은 것을 준비한다. 활자로 적혀 있는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연기 이전에 벌써 어떤 신발을 신을 것이고, 어떤 옷을 입을까 부터 고민해야 하니까. 관객은 시나리오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말해지는 태도와 대사를 통해 감독이나 작가의 메시지를 이해하니까 내가 창작자와 관객을 연결해주는 도구인 셈이다."
-연기라는 것이 창의력이 필요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새삼 든다. 얼마 전 직접 디자인한 티셔츠를 선보이기도 했는데, 창작적인 작업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영화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그런 일로 푸는 것 같다. 영화에 치이다 보면 때때로 다른 일을 통해 마음을 정화시키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쪽 일을 하고 싶지는 않다. 종종 제안을 받기도 하는데,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면 옷에 치여 재미없어 질 것이다. 디자이너들 중에 자신의 옷차림에는 신경 안쓰는 분들이 있는데 그게 옷에 치여서 그렇다고 하더라."
-얼마 전 기사에 '무한도전'에 출연할려고 했다가 프로그램 내부 사정으로 출연이 무산됐다는 내용이 실렸다.
"우리 영화가 딱 '무한도전' 콘셉트다. '루저'들이 모여 뭔가를 열심히 하는데, 결코 1등은 되지 못하고,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출연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별로 말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 다른 오락프로는 부담스럽기도 하고 해서."
-의외다. 예전에 출연한 오락프로에서 정말 재미있는 모습을 많이 선보이지 않았나?
"그게 무섭다는 거다. 특히 편집이라는 것. 내가 했던 말 중에 가장 재미있는 부분만 편집해서 보여주니 내가 굉장히 재미있고, 약간은 가벼운 사람인 것처럼 시청자들은 오해한다. 나도 보면서 내가 아닌 내 모습이 그려지니 당황스러웠다. 1시간 분량의 방송을 위해 왜 6시간에 걸쳐 녹화를 하는지 알겠더라. 처음에는 그런 것 때문에 고민도 많았다. 미디어가 만든 내 허상과 실제 내 모습 사이에서."
-얼마전 시네마테크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관객들과 함께 보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참석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라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다.
"너무 좋았다. '아이다호'라는 영화를 관객과 같이 봤는데, 고등학교 이후 처음 보는 거라 그때와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당시 이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답답했었다. 너무 내 얘기라서 보는 내내 괴로운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에 다시 보니 그때만큼 아프지는 않더라. 내가 그만큼 나이가 들었고, 삶에 여유가 생겼다는 증거겠지."
-앞으로 많은 작품을 해나갈텐테,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좋은 배우(웃음). 사실 어떤 배우가 좋은 배우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 류승범과 배우 류승범은 같이 가는 거니까 좋은 배우가 되기 전에 인간 류승범의 상태가 좋아야 되겠지. 그래야 시나리오를 보더라도 깊게 보고, 풍성한 연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겸손 같은 인간적 덕목을 먼저 갖춘 배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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