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권혜림 기자] 한국계 할리우드 배우 스티븐 연의 행보는 흥미롭다. 그를 세계 팬들에게 알린 작품이 좀비 소재의 드라마 '워킹데드' 시리즈였다면, 지금 그를 칸에 세운 작품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작가주의 감독 이창동의 신작 '버닝'이다.
주로 미국에서 활동해 온 그는 신연식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프랑스 영화처럼'을 시작으로 봉준호 감독의 '옥자', 이창동의 '버닝'에 이르기까지 한국 감독들과도 인연을 이어왔다. 거대 규모의 시즌제 드라마와 블록버스터부터 독립 예술 영화까지, 시선은 드넓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한국계 배우 중 한 명인 그가 '버닝'을 통해 청춘의 고독을 들여다봤다.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엔 2018년 한국 사회라는 시공간적 특성이 주효하다. 하지만 한국인과 이방인의 정체성 그 어딘가에서 자주 고민하는 스티븐연에게 '버닝'은 보다 보편적인 주제를 담은 영화로 다가왔다. 편견으로 그려진 아시안 캐릭터도, 인종적 이방인으로서의 인물도 아닌 '버닝'의 벤 역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의 연기가 온전히 피어나는 순간을 느꼈다고도 고백했다.
지난 18일(이하 현지시각) 제71회 칸국제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 칸의 해변 모처에서 경쟁부문 초청작 '버닝'(감독 이창동, 제작 파인하우스필름, 나우필름)의 이창동 감독과 배우 유아인, 스티븐연, 전종서가 참석한 가운데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버닝'은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 분)가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 분)를 만나고, 그녀에게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 분)을 소개 받으면서 벌어지는 비밀스럽고도 강렬한 이야기. 일본의 유명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이다. 지난 16일 칸에서 첫 선을 보인 뒤 현지 언론의 호평을 받고 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이창동 감독과 첫 작업을 한 스티븐연은 그간 감독의 영화를 통해 자신이 채 알지 못했던 한국에 대해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이 감독의 영화 중 '시'를 가장 먼저 봤다는 그는 "보고 배웠던 한국과 (영화를 통해) 느끼는 한국이 완전히 다르더라"고 답했다.
"엄마가 제가 가장 많이 한 말은 '(한국에 대해)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 모른다'는 거였어요. 그게 정확한 말이었어요. 저도 미국에 살며 한국인들과 함께 다녔는데, 그래도 한국에 대해 완전한 느낌을 얻진 못했거든요. '시' 속 할머니가 침대에서 말하는 장면을 보며 눈물을 흘렸어요. 어릴 때부터 잘 우는 편이 아니었는데, 그 때부터 한국과 내가 (정서적으로) 연결돼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이후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나 '박하사탕'을 보면서도 '이게 한국이구나' '이게 이창동 감독의 영화구나' 생각했고요."
'버닝'의 촬영을 위해 한국에 머물면서, 또한 과거와 달리 한국인으로 비춰지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스티븐연은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자유로움을 얻기도 했다. '버닝'의 현장에서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영화 속 한국어 대사들을 매끄럽게 소화했던 그는 이날 인터뷰 역시 대부분의 질문에 한국어로 직접 답했다. 보다 정교한 설명이 필요할 때에만 통역의 도움을 받거나 영어로 첨언했다. 지난 2017년 '옥자'로 칸에 방문해 한국 기자들을 만났던 당시 그는 최대한 한국어로 답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어로 답을 꺼냈다가도 이내 "죄송하다"며 통역을 통해 답했었다. 1년여 만에 놀라운 한국어 실력을 보여줘 기자들의 감탄을 샀다.
"여유와 자유가 생겼어요. 미국에선 동양인이니 배역에 여유를 준다 해도 동양사람으로서의 '레이어'가 가장 크거든요. 그저 '동양인 배역'이라는 스테레오타입에 더해 더 미묘한 면이 남아있어요. (할리우드 작품에서 동양인 배역은) 아주 착한 사람, 전하고 예민한 사람, 늘 착한 말만 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죠. 많은 분들이 '워킹데드'의 글렌으로 저를 기억해주고 좋아해주시지만, 제가 다시 생각할 때 글렌 역시 완전히 자신을 펼 수 없는 인물이었어요. 여유가 없는 캐릭터였죠."
'버닝'의 벤은 다른 인종 속 이방인도, 인물의 특징이 곧 아시안의 특징인 도구적 캐릭터도 아니었다. 스티븐연에게 벤 역은 할리우드에서 동양인 배우로서 느껴 온 고민과 한계를 뛰어넘는 경험이었다.
"이창동 감독은 저를 불러 '완전한 한국 사람을 느껴보라'고 해 주셨어요. 너무 감사하죠. 제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여유가 생겼어요. 연기를 할 때도 참 좋았고요. '나도 이제 다른 역할들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남아있어요. '내가 완전히 편안할 때는 이만큼이나 피어날 수 있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저는 할리우드에서 받아주지 않고, 한국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면 혼자만 남게 되잖아요. 처음엔 그걸 느끼며 슬픈 마음이 들었는데, 넘어서니 힘을 얻어요."
'버닝'이 그리는 청춘의 고독과 무력감에 대해선 비단 한국 뿐 아니라 세계의 청년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고민들이라 내다봤다. 스티븐연은 "나라마다 청춘의 모습이 조금씩 다르지만 이제 점점 더 같아지는 것 같다"며 "원래는 같은 모습이었을 것 같고, 이제는 진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에게 세상은 조금 무서워요. 사는 데에 특정한 방법이나 규칙이 없으니까요. 나름의 룰이 있겠지만 뭐가 진짜인지는 모르죠. 젊은이들은 다 외로운 것 같아요. 그걸 넘어서면 힘을 얻을 수 있으니 이겨내길 바라요. 국적을 초월해, 외로움 속에 우리가 다 함께 있다는 생각도 해요. 어느 나라의 청년들이든 다 겁을 먹고 있고, 모두 연결돼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한편 스티븐연은 지난 2017년 '옥자'로 제70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데 이어 올해 '버닝'으로 2년 연속 칸 경쟁 초청의 영예를 안았다. 제71회 칸국제영화제는 19일 폐막식을 열고 수상작(자)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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