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필기자] 2012년 12월. 수원 삼성 사령탑에 오른 서정원(46) 감독은 가장 먼저 독일에 거주하고 있던 스승 데트마르 크라머(독일) 감독을 찾았다.
크라머 감독은 서 감독의 축구 지도자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991년 1월 한국 올림픽 대표팀 총감독 겸 기술고문을 맡아 집중적으로 지도했고 이듬해 2월 내부 갈등 문제로 대표팀을 떠났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본선 진출권을 얻어 놓고도 떠나야 했다.
그의 업적은 대단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일본을 이끌고 동메달을 획득했고 1975년 독일 최고 명문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고 1975, 1976년 유러피언컵 정상에 올려놓았다. 이후 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의 사령탑을 맡는 등 독일 축구 명장 중 한 명이었다.
당시 서 감독은 올림픽 대표팀으로 활동하며 크라머 감독의 합리적인 지도 방식에 감명받았다. 서 감독은 매년 크라머 감독을 찾아 지혜를 구하며 치열하게 공부를 했다. 2013년 수원 지휘봉을 잡은 뒤에도 시즌이 끝나면 크라머를 찾아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다. 지난해 9월 18일 크라머 감독이 별세하자 서 감독은 19일 FC서울과의 슈퍼매치에 검은색 정장, 넥타이를 착용하고 추모했다.
8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FA컵 우승 인터뷰에 나선 서 감독은 "크라머 감독님 앞에 가서 우승했다고 말해드리고 싶다. 크라머 감독님을 뵈면 수원 머플러도 걸어드리고 했는데 정말 내게 격려를 많이 해주셨다. 늘 내게 2~3시간씩 이야기를 해주고 그랬다. 그 내용을 숙소에 붙여 놓고 생각나면 본다. 크라머 감독과 같이 사셨던 분이 한국인이라서 이메일로 이렇게 해보라는 내용이 길게 오고는 했다. 처음 읽을 당시에는 '아 그렇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보니 무슨 뜻으로 하는지 느껴진다"라고 스승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크라머 감독은 서 감독에게 늘 '인내'를 주문했다. 올해 K리그 클래식 강등권까지 내려갔다가 기사회생하며 잔류에 성공한 뒤 FA컵 우승을 하면서 눈물을 쏟았던 감동 모두 인내의 힘이었다.
서 감독은 "크라머 감독은 조급함을 갖지 말라. 감독이면 한 걸음 뒤에서 한 번 바라보라. 힘들수록 천천히 가라고 하시더라. 과거는 뜻을 잘 몰랐는데 어려운 상황에 선수들을 강하게 압박하지 말고 운영하라는 이야기더라. 시간이 흐를수록 다시 새긴다"라고 전했다.
첫 우승컵을 들고 당당하게 크라머 감독에게 갈 수 있게 된 서 감독은 "감독님의 철학이 우리 선수들에게 스며들었다"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주장 염기훈이 선수단을 하나로 묶어 참아내고 선참급인 곽희주나 이정수 등이 멘토로 후배들을 다잡으며 위기를 극복했던 것 모두 크라머의 철학이 자신을 거쳐 나온 것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크라머 감독의 제자는 서 감독 외에도 신태용(46) 19세 이하(U-19) 대표팀 감독, 조진호(43) 부산 아이파크 감독 등이 있다. 신 감독 지난 8월 리우 올림픽을 앞두고 크라머 감독의 묘소를 찾아 그의 기운을 받는 등 스승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신 감독과 절친인 서 감독은 "늘 (신)태용이가 웃긴 이야기로 크라머 감독 집에 가면 저는 식사를 하는데 자신에게는 밥도 주지 않는다. 빈소에 갔더니 수원 머플러가 이미 있더라"라며 은근히 자신이 크라머 감독의 제1 스승임을 강조했다.
크라머 감독은 민주적이면서 평등한 지도력을 이들에게 보여줬다. 서 감독의 소통 리더십이나 신 감독의 형님 리더십은 모두 한뿌리다. 그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팀에서 뛸 당시 나승화, 김귀화 등 선배들이 즐비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감독님이 주장을 바꾸겠다더니 나보고 하라고 하더라. 그 이후 자주 나를 불러서 이야기하고 신경도 많이 써줬다"라는 일화를 소개했다.
서 감독의 지도자 입문을 알게 된 크라머 감독은 그를 독일 축구협회 주관의 코칭 스쿨을 소개했다고 한다. 서 감독은 "내가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다고 하니 많이 놀라면서 당장 코칭스쿨로 오라고 하더라. 전 세계 지도자들이 오는 곳인데 가보니 VIP 대우를 해주더라.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 번 하시고는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정말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라며 스승의 깊은 가르침이 오늘의 서정원을 만들었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기다림'을 강조한 크라머의 지도 철학은 힘든 순간 팀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자신을 채찍질하는 계기도 됐다. 올해 서 감독은 중도 사임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끝없는 침체에 팬들이 선수단 버스를 가로막는 등 구단을 성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 감독은 "힘들 때 사퇴를 생각했지만, 과연 그런 선택이 돌파구를 마련해 주느냐, 사퇴해서 선수단에 한 번 정도는 큰 반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책임감이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수들이 나를 믿고 4년이나 같이 있었는데 여기서 놓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참은 결과가 클래식 7위와 FA컵 우승으로 왔다고 말했다.
중국 슈퍼리그 진출설에 대해서도 선을 그었다. 그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진출을)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이 팀을 쉽게 놓고 가고 싶지는 않다. 워낙 정이 많이 들었고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꼭 수원에서 감독하면서 정말 우승컵을 다시 한번 얻고 싶다. 6년 만의 우승인데 아직 리그나 아시아 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도 남아 있다. 작은 것을 하나 얻었는데 다른 것을 얻어야 하는 숙제가 내게 있다"라며 강한 우승 열망을 드러냈다.
<②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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