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여러 야구인들 가운데 필자의 뇌리에 가장 인상깊게 남은 사람이 있다. 통산 868홈런의 주인공 왕정치(王貞治·오 사다하루, 편의상 한국식 발음으로 표기)다. 일본 야구의 전설적 존재인 바로 그 인물이다.
성공한 야구인들은 자부심이 무척 강하다. 국적과 리그에 관계없이 '전설'로 추앙받는 야구인들 상당수는 웬만해선 남에게 고개를 숙이려 들지 않는다. 맨손으로 출발해 한 분야에서 '장인'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다. '프라이드'의 정도가 일반인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야구의 나라' 일본에서 '위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라면 고개가 무척 뻣뻣해지기 마련. 그러나 왕정치는 다르다. 그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는 몇 안 되는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아시아라운드 우승 결정전 한·일전이 열린 2009년 3월 9일. 유영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 일행은 도쿄돔 301호 원정팀 귀빈실에 자리 잡았다. 도쿄돔에는 3개의 VIP 라운지가 있는데 하나는 1루측(101호) 홈팀용, 하나는 3루쪽 방문팀용이다. 나머지 하나는 중앙에 자리 잡은 일본 천황가를 위한 특별실이다. 이 방은 도쿄돔 개장 이후 단 2번만 문이 열렸다고 한다. 경기가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은 시점, 한국 측 귀빈실에 왕정치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는 유 총재를 향해 "한국에서 귀한 분이 오셨다고 해서 인사 드리러 왔다. 한국의 선전을 기원하며 좋은 관람이 되셨으면 한다"고 덕담을 건넸다. 말로 표헌할 수 없을 만큼 무척 고마웠다. 왕정치 정도 되는 인물이 직접 KBO 커미셔너를 찾아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표했다.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강타자이자 앞선 2006년 제1회 WBC에선 일본을 우승으로 이끈 명장이다. 당시 방에 있던 한국 측 인사들의 입이 귀에 걸린 건 당연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당시 다과로 준비했던 지바산 딸기 한 접시를 왕정치가 있는 일본측 귀빈실로 보낸 기억이 있다.
일본에서 성공한 그 어떤 야구인도 한국 KBO 총재가 왔다며 인사하러 온 적이 없다. 반대로 외국에서 귀빈이 방문했을 때 한국의 유명 야구인들이 직접 예의를 갖췄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왕정치는 달랐다. 그는 일본 야구의 '큰 어른'답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고 한 것이다. 그는 미국 본선 한·일전을 앞두고도 같은 호텔에 묵은 필자에게 "어이 조상, 오늘 중요한 날이지. 우리는 쉽지 않을 것 같아"라며 필자의 어깨를 두드린 적이 있다. 그는 일본 대표팀 감독이던 2006년 WBC 아시아라운드를 앞두고 한국과 일본의 훈련 일정이 충돌하자 같은 날 두 팀이 후쿠오카돔에서 훈려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적도 있다. 그만큼 손님을 챙길 줄 아는, 예의를 아는 따뜻한 인물이다.
◆미숙아로 태어난 사생아
왕정치는 194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출생 18년 전인 1922년 중국 저장성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아버지 왕사복(王仕福)과 일본인 어머니가 낳은 둘째 아들이었다. 당시 중국과 일본은 적대국이었던 까닭에 왕정치의 부모는 정식 결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왕정치와 형은 법적으로 어머니의 사생아(私生兒)였다. 왕정치는 태어날 때 울지 않는 미숙아였고, 3살이 되어서도 걷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 시기여서 외국 아이들은 일본 어린이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받는게 예사였다. 왕정치는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체격이 몰라보게 커졌다. 175㎝에 어깨가 떡 벌어진 그는 무척 호전적이고 싸움꾼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왕 씨의 고향은 의사와 전기가 없는 깡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큰 아들을 의사, 왕정치는 전기기사로 키워 고향으로 보내는 게 꿈이었다. 왕 씨는 도쿄에서 중국식 라면 전문점을 운영했다. 맛이 좋아 줄을 서서 먹을 정도로 인기있는 점포였다.
왕정치는 아버지의 권유로 명문 '스미다고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결국 2차 시험을 거쳐 '와세다실업고교'에 합격한다. 스미다고에는 연식 야구부만 있었을 뿐 정식 야구부는 없었다. 만약 그곳에 합격했다면 본격적인 야구수업을 받지 못할 뻔했다. 그래서 왕정치는 고교 1차 시험 낙방이 인생의 큰 분기점이 됐다고 한다.
인생의 선배이자 야구스승인 아라카와 히로시(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 역임)를 이 시기에 만난다. 아라카와가 마이니치 오리온스(현 지바롯데 마린스) 강타자로 이름을 날릴 때였다. 왕정치는 당시 왼손으로 수비하고 오른손으로 타격했는데, 이유는 아버지로부터 젓가락, 연필, 주판은 오른 손을 써야 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왕정치는 타격도 오른쪽에서 시작했지만 아라카와를 만나면서 왼손타자로 변신했다. 좌타자인 아라카와는 "왼손타자가 더욱 희소가치가 있다"며 완고한 왕정치의 아버지를 설득했다. 지도를 받자마자 실천에 옮기는 왕정치를 보고 그는 훗날 대스타가 될 것을 직감했다고 한다.
◆868홈런, 그 이상으로 위대한 야구인
왕정치는 프로 신인 시절부터 배트·글러브 등 야구장비는 늘 직접 챙겼다. 연습 후 배트는 깨끗하게 닦아서 보관함에 넣어뒀다. 글러브는 보통 10년 이상을 사용했다. 유니폼은 세탁이 끝나면 정리정돈을 깔끔하게 해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외유내강의 표본으로 일상 생활에서 팀 동료들과 부딪힌 일은 거의 없었다. 왕정치는 연습벌레였다. 공식 훈련이 끝나면 숙소로 돌아가 다다미방에서 발바닥의 지문이 지워질 정도로 배트를 휘둘렀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외다리 타법도 연습을 통해 자신 만의 폼으로 만든 것이다.
1966년 자신의 팬과 결혼한 왕정치는 세 명의 딸을 뒀다. 한국과 중국에선 혼인 후 남·녀가 결혼 전의 성을 유지하지만, 일본 여성들은 서양처럼 결혼 이후 남편의 성을 따른다. 왕정치는 그래서 딸들에게 모두 '理(다스릴 리)'자가 붙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결혼 후 성이 바뀔 딸들에게 왕 씨 집안 출신임을 잊지 말라는 의미였다. '理는 '里(마을 리, 고향의 의미)'에 '王(왕)'을 합친 글자다. 아들이 없는 왕정치가 자신의 성을 남기기 위해 선택한 조치로 그의 유교적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왕정치는 지난 2001년 부인과 사별했는데, 당시 장례식을 찾은 손님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전화로 답례를 한 것 또한 그의 인성을 알 수 있는 좋은 일화다. 왕정치는 평소 펜레터와 연하장은 빼놓지 않고 읽으며 반드시 직접 답장을 쓰는 사람이다.
사실상 일본 사람이지만 그의 국적은 중화민국, 즉 대만이다. 2006년 WBC 감독 당시 국적에 관한 질문이 나왔을 때의 답변은 유명하다. "아버지는 중국인이지만 어머니는 일본인입니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고, 일본의 교육을 받고,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로서 인생을 보내왔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일본인입니다."
현역 일선에서 물러난 왕정치는 현재 일본의 신흥 명문구단으로 발돋움한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팀의 스프링캠프부터 시즌 끝까지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지만 현장에 간섭하는 일은 절대 없다고 한다. 야구에서 스타는 항상 존재한다. 전설은 시간을 두고 등장한다. 하지만 왕정치와 같은 예의와 자세, 그리고 실력과 인성을 모두 갖춘 인물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는 868홈런이란 대기록 이상으로 위대한 인물이다.
조희준은 20년 이상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야구행정을 다루며 프로야구의 성장과정을 직접 지켜봤다. 국제관계 전문가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출범 당시 한국 측 협상단 대표로 산파 역할을 맡았다.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문학부 출신으로 일본 야구에 조예가 깊은 그는 ▲KBO 운영부장 및 국제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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