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재기자] 스페인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시기는 역시나 16세기 말 '무적함대'가 세계를 호령했던 시대이다.
16세기 말 스페인 왕 펠리프 2세는 네덜란드, 포르투갈, 나폴리 등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남미까지 거대한 식민지 통치를 했다. 스페인이 이렇게 강력한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펠리프 2세가 편성한 대함대, 이른바 '무적함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힘과 행운이 있는 함대라고 평가 받고 있다.
하지만 영원한 강자는 없는 법. 무적함대도 그 위용을 잃어야만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무적함대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끄는 영국에 패배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스페인은 더 이상 세계사에서 강대국의 역사를 남기지 못했다. 무적함대 시대의 종말은 곧 스페인의 찬란했던 시대의 끝을 의미했다.
21세기,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다시 등장했다.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압도적인 위용을 떨쳤다. 무적함대가 지나가는 길을 막을 자가 없었다. 세계 축구사에 뜨겁게 등장한 스페인 축구 대표팀. '티키타카'라는 최고의 무기를 앞세워 21세기 세계 축구를 호령한 무적함대였다.
2008년 스페인은 유로 2008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무적함대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2010 남아공 월드컵 패권까지 거머쥐며 무적함대의 위용을 전세계에 떨쳤다. 무적함대는 유로 2012까지 석권하며 전대미문의 메이저대회 3연속 우승이라는 역사를 남겼다.
그리고 무적함대는 메이저대회 4연속 우승과 함께 월드컵 2연패를 노렸다. 스페인은 여전히 FIFA 랭킹 1위였다. 남아공 월드컵 우승 주축 멤버도 대부분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무적함대의 위용이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스페인은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로 꼽혔다.
그런데, 무적함대가 처참하게 침몰했다. 무적함대의 위용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다. '디펜딩 챔피언'의 자존심은 허망하게 무너졌다. 무적함대를 침몰시킨 이들은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14일 새벽(한국시간) 브라질 사우바도르 아레나 폰테 노바에서 펼쳐진 2014 브라질 월드컵 B조 1차전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판 페르시의 2골과 로번의 2골, 그리고 데 브라이의 1골을 더해 5-1 대승을 거뒀다.
FIFA 랭킹 1위 스페인은 15위 네덜란드에 굴욕적인 참패를 당했다. 더욱 치욕스러운 것은 네덜란드는 세대교체 중이라는 것이다. 네덜란드 수비수들 대부분이 월드컵에 처음 나서는 선수들이었다. 경기 전 스페인의 우세가 점쳐졌지만 성급한 판단이었다. 스페인은 무기력했다. 네덜란드의 신선한 힘에 처참하게 무너졌다.
스페인의 가장 큰 문제는 수비였다. 사비 알론소(34세), 라모스(29세) 등 노쇠한 수비수들은 네덜란드의 빠른 발을 따라가지 못했다. 또 조직력에서도 최악의 모습을 보였다. 사비 에르난데스(35세), 이니에스타(31세) 등 미드필더들도 노쇠함으로 인해 중원에서 상대를 압박하지 못했다.
세계 최고의 골키퍼라 불리는 카시야스의 침몰도 컸다. 카시야스는 공중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골을 허용하더니, 수비수가 건넨 공을 제대로 걷어내지 못해 판 페르시에게 빼앗겨 골을 허용하는 굴욕적인 장면도 연출했다. 한 경기 5실점. 카시야스 커리어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경기였다.
무적함대에 녹아들지 못하는 최전방 공격수 코스타도 무적함대 침몰에 큰 역할을 했다. 코스타는 스페인 대표팀으로 첫 월드컵에 나섰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만 스페인 대표팀에서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후반 교체 투입된 토레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격의 침묵, 중원과 수비의 노쇠화, 그리고 최고 골키퍼의 좌절까지. 스페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어떤 위력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이런 무기력한 스페인의 모습이 무적함대 시대의 '종말'을 예견하고 있는 것만 같다. 지난 6년 동안 이어진 최강 스페인의 위용이 이제 힘을 잃을 때가 온 것만 같다. 이런 예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스페인은 무적함대 시대가 개막한 후 처음으로 가장 나약한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아직 조별예선 2경기가 남아 있다. 칠레와 호주전 결과에 따라 스페인은 16강에도 진출할 수 있다. 더 높은 곳으로도 갈 수 있다. 지난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도 조별예선 1차전에서 스위스에 0-1로 패배했다. 불안한 출발을 했다. 이후 전승으로 우승컵까지 들어 올린 스페인이다.
하지만 남아공 월드컵 때와는 분위기는 다르다. 분명 다르다. 스페인이 무너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였다. 스페인이 다시 한 번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사라졌다. 5실점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역사는 항상 말한다. 영원한 강자는 없다고. 스페인의 무적함대도 새 시대의 흐름대로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일까. 무적함대의 시대도 종말을 선언하는 것일까. 새로운 강자의 등장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16세기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배한 것이 스페인 왕국의 하락과 함께 네덜란드가 독립하는 계기가 됐다. 21세기 스페인 무적함대의 패배는 스페인 축구의 하락과 네덜란드의 성공적인 세대교체의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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