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아무리 뻔뻔하고 능청스러운 얼굴로 장난을 걸어도 도무지 얄밉지가 않은 사람이 있다. 태생적으로, 남을 무장해제시키는 능력을 타고난 이들이 그렇다. 배우 류승룡도 그랬다. 특유의 깊은 눈매로 앞에 앉은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다가도 장난기 가득한 웃음으로 상대조차 웃음을 금치 못하게 만드는 사람. 아마 류승룡을 만나 본 많은 이들이 기자와 같은 인상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영화 '12월23일' 촬영과 '광해' 홍보로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류승룡을 지난 19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났다. 피곤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농약 안 치고 힘들게 농사 지은 농산물을 소비자들이 먹어보고선 몸에 좋다고 하는데 힘들 리가 있냐"며 영화를 건강하게 재배된 먹을거리에 비유했다. 이어 "힘든 것 하나도 없다"며 "짬짬이 많이 쉬고 있다"는 말로 근황을 전했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연기로만 나를 아는 것, 나쁘지 않다"
2012년 상반기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장성기로 분해 관객을 홀린 그가 차기작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허균으로 돌아왔다. 관객들은 불과 몇 개월 만에, 그야말로 180도 다른 얼굴을 한 그를 스크린에서 다시 만나게 됐다.
극중 허균은 자신을 암살하려는 세력 사이에서 두려움에 떠는 왕 광해와 그를 꼭 닮은 얼굴 탓에 왕의 대역을 맡게 되는 하선 모두와 호흡을 나눈다. 광해와 하선을 모두 연기한 이병헌은 각 캐릭터를 살린 영리한 연기로 언론과 관객의 찬사를 고루 받았다.
그렇다면 허균으로 분한 류승룡의 연기는 어땠나. 광해와 하선을 연기한 이병헌에 비해 다이내믹한 반응을 이끌진 않았지만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모든 진실을 꿰뚫는듯한 그 눈빛이 영화의 중심을 지켰음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장성기도 허균도 제 호흡으로 살려낸 류승룡을,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불특정 다수 말고,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내가 무서울 것이란 선입견은 배제한 경우가 많죠. 영화만 보고 선입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내 아내의 모든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대학 때 친구들은 '딱 너다'라고 했거든요. 배우에 대해서도 아는 것만큼 보이는 것 같아요. 문화나 민족, 역사처럼. 내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날 잘 알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이 연기로만 (나를) 아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배우 류승룡, 그리고 아버지 류승룡
관객들에게 류승룡은 재기와 진지함을 모두 갖추고 팔색조 연기를 펼치는 배우지만 두 아들에게 그는 흔치 않게 자상한 아버지다. 아이들을 대하는 류승룡의 모습은 "지금의 기분을 춤으로 설명해보라"는 주문을 즐겨 하고, 혼이 날 행동을 했을 땐 사색을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에서 스스로 반성의 시간을 갖게 돕는 식이다.
"내가 가면 (아이들이) 나를 반기는 세리머니가 있어요. 뛰어다니고 소리 지르고 점프를 하고 어쩔 줄을 몰라요. 매일 봐도 항상 그래요.(웃음) 뭘 잘못했을 때는 채근을 하거나 왜 혼났는지까지 가르쳐주는 것보다는 왜 혼났는지 스스로 알 때까지 놔 두죠. 아이들과는 동물 놀이, 싸움 놀이도 하고 같이 조립식 블럭을 쌓기도 하고, 공도 차고 산책도 해요."
최근 '광해'의 공식 석상에서 그는 동료 배우들에게 "CF가 네 개 밖에 들어오지 않았다"며 푸념한 사실이 알려져 웃음을 낳았다. 이후 CF에 대한 숱한 질문을 받았을 그에게, 최근 더 들어온 광고는 없는지 물었다. 그는 "굿다운로더 캠페인을 하나 더 찍게 됐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내 아내의 모든 것' 속 장성기 캐릭터를 살린 이동통신사 멤버십 광고로 생애 첫 단독 CF 모델이 됐다.
"('CF 네 개' 발언은) 농담한 거고, 너무 감사하죠. 난타 때 말고, 배우 개인적으로 찍은 CF는 처음이었어요. 돈을 많이 버는 줄 오해들을 하는데, 소위 말하면 개런티를 이야기하는 배우들은 10배 이상이예요. 일반 사람들은 (내 개런티도) 그런 줄 아는데, 일일이 보여줄 수도 없고 가슴 아픈 일이죠.(웃음)"
◆"스스로 마케팅, 이런 게 재미 아닌가 생각한다"
가만 가만 이야기를 던지는 그를 보며, 배우 아닌 어떤 일을 했어도 잘 먹고 잘 살며 행복한 삶을 즐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 아닌 류승룡이라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묻자 "아이디어를 쓰는, 창조적이고 진취적인 일을 좋아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어 "광고나 건축에도 관심이 많다"며 "실용성, 채광, 사생활 보호, 친환경, 통풍, 단열, 보온, 조망권, 일조권" 등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좋은 건축물의 조건을 끝없이 나열했다.
최근 류승룡의 행보를 지켜본 이들이라면 그가 또 하나의 관심 분야로 광고를 언급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내 아내의 모든 것' 개봉 당시 관객들에게 '장성기가 짠 우유'를 선물했던 그다. '광해' 홍보 기간에는 직접 엿을 준비해 수백 명의 관객들에게 돌렸다.
"내가 내 스스로 마케팅을 할 때가 있어요. '최종병기 활' 때는 '활 명수, 시원하게 내려갑니다'로, '내 아내의 모든 것' 때는 '장성기가 짠 우유'로 마케팅했죠. 이번엔 '엿 드세요' 하면서 700명에게 엿을 돌렸고요. 그런 게 좋아요. 조금 노력해서 관객들이 '재밌다' 하게 만드는 것. 이런 게 재미 아닌가 생각해요."
그가 지난 2011년 매니지먼트를 국내 굴지의 PR회사 프레인의 계열사인 프레인 TPC로 옮긴 것 역시 창조적인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관심도와 매니지먼트를 옮긴 정황이 서로 연관이 있는지 묻자 그는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라며 "일방적으로 관리를 받는 것이 아닌, 서로 좋은 기운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설명했다.
'내 아내의 모든 것'과 '광해'가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나란히 이끌어내며, 류승룡은 두말할 필요 없이 2012년 한국 영화계를 묵직하게 장식한 배우가 됐다. 점차 뚜렷하고 짙은 빛깔로 스크린을 빛내기 시작한 그는 어느새 기대를 배반하지 않을만한 연기자로 확실한 존재감을 알렸다.
그러나 배우 류승룡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은 좀처럼 끝이 보이질 않는다. 매 작품마다 진폭있는 연기로 제 몫을 다 해낸 배우가 아닌가. 그가 보여줄 또 다른 얼굴을 기대하는 것, 그 긴장감을 즐기는 일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추창민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광해'는 지난 13일 개봉해 흥행 중이다. 류승룡·이병헌·한효주·김인권·장광이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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