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이성필 기자] 정말 상상 이상의 경기였습니다. 2018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F조 최종전 독일과의 경기 말이죠. 경기 흐름을 보면서 기사를 작성하는 입장에서 골이 터진 상황도 놀라운데 끝 무렵에 터졌으니 더 혼란과 경악, 공포, 기쁨, 놀라움이 모두 뒤섞였습니다.
27일 오후(한국시간) 러시아 카잔의 카잔 아레나 풍경이 그랬습니다. 한국이 전차의 기동력을 무력화시키며 계속 뛰어다니니 관중석에서는 함성이 터졌습니다. 빠른 역습에서 골이 터지지 않았을 뿐, 모두 놀라워했습니다. 그러다 막판에 두 골이 터졌고 원정 응원을 온 1천5백여 한국 팬들은 물론 러시아 팬들까지 모두 놀라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독일 팬들은 침묵했고요.
사실, 한국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계실 겁니다. 멕시코가 스웨덴을 이겨주고 한국이 독일에 두 골 차 승리를 거둬야 16강 진출이 가능하다는, 한마디로 자력+타력이 모두 섞여 있어야 한다는 거죠.
'가능할까'에 대한 물음에 상상만 했습니다. 그려만 봤죠. 독일전을 하루 앞둔 26일 기자회견장에서 만났던, 이름을 까먹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기자와 러시아 스포르트의 아이랏 사밀라로프 기자 모두 "독일이 이길 것 같은데 골 차이가 얼마나 나느냐의 승부인 것 같다"고 진단했거든요.
사밀라로프 기자는 "이번 대회 한국의 경기를 다 봤다. 뭔가 섬세함이 부족하더라. 잘만 다듬으면 좋은 팀이 될 것 같은데 아쉽더라. 가장 의문인 것은 스웨덴전에서 꼭 그렇게 내려서서 플레이를 해야 했는가"라고 반문하더군요.
뭐, 여러 시선이 있겠죠. 한국의 전략적 선택이었기 때문에 이는 차후에 따져봐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그래도 마지막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지 독일전에서 다시 만나자 "다른 유럽 국가들이 독일을 만나면 어떻게 경기를 해야 하는지 한국이 확실하게 힌트를 준 것 같다. 독일의 장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더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려 주더군요.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된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기는 합니다. 16강 진출에 실패한 것은 아쉽지만, 정말 보기 어려운 귀한 승리를 봤으니 말이죠. 부상자가 빠져 '비정상적'인 전력이라 평가받을 수도 있지만, 지금 모여 있는 선수들은 분명 최고의 전력일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잠시 4년 전 기억을 떠올려 볼까 합니다. 조이뉴스24는 2014 브라질월드컵을 마이애미 사전 캠프부터 동행 취재를 했었는데요, 취재하던 기자는 수염을 길렀었습니다. 한국이 월드컵 첫 승을 하면 면도를 하겠다는 나름의 의지를 보였던 거죠.
하지만, 1무2패로 대회가 끝났고 한국 귀국길에 알아서 면도해야 했습니다. 월드컵을 취재하는 입장에서도 승리를 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생각해보시면 알 겁니다. 2010 남아공월드컵 그리스와 조별리그 1차전 2-0 승리가 독일전 이전 가장 근접했던 승리였으니까요.
이번 대회를 앞두고도 역시 면도를 하지 않고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르며 버텼습니다. 한국이 첫 승을 하면 하겠다는 나름의 법칙을 세웠죠. 그런데 스웨덴, 멕시코에 연패하면서 전망이 어두워졌죠. 게다가 마지막 상대가 독일이었기 때문에 '정말 가망이 없는 건가'라는 의심을 했습니다.
몰론 기자가 믿고 있는 신에게도 기도를 해봤습니다. "제발 취재하는 월드컵에서 승리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요. 16강 진출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옵션으로 밀어뒀습니다. 이렇게 기자가 '우리 안의 불신과 의심'을 하는 동안 선수들은 1%의 기적을 두고 "할 수 있다", "해보겠다"는 도전 정신으로 뭉쳤고 기어이 해냈습니다. 한국인의 도전정신이 빛나는 순간이었네요.
물론 독일전을 이겼다고 한국 축구 시스템 개혁이나 반성, 보완점을 무시해서는 안될 겁니다. 지금은 잠시 승리 기쁨에 취하더라도 냉정하게 따질 것은 따져봐야겠죠. 패장으로 공식 기자회견에 나선 요하임 뢰브 감독에게 '치욕', 반성', '자만' 등의 단어가 쏟아진 것으로만 봐도 독일은 철저한 반성 후 다시 달라져 나올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도 이런 과정을 분명하게 거쳐야 한다고 봅니다. 주변국들은 과감한 투자로 경쟁력 높이기에 골몰하고 있기 때문에 위기의식도 가져야 하니까요.
참, 사실 경기장으로 출발 전 숙소에서 면도를 해버렸습니다. "제발 면도 좀 하라"고 외쳤던 동료 기자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더라고요. 뭐랄까, 기자만의 결사 항전 의식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브라질월드컵 당시의 기억으로 반은 내려놓았지만, 작은 기적은 믿어봤거든요. 그런데 해냈습니다. 선수들과 취재진이 만나는 공동취재구역(믹스트존)에서 굳은 표정으로 대기하는 취재진이 한국이 아니라 독일이라 더 다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축구대표팀에 감사합니다. 면도하고 대표팀 베이스캠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복귀하게 해줘서요.
/카잔(러시아)=이성필 기자 elephant14@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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