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이성필기자] 역사는 또 반복됐습니다. 울리 슈틸리케(63) 축구대표팀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중도 사임하며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사령탑으로 남게 됐습니다. 형식은 상호 합의에 따른 계약 해지지만 사실상 경질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제(15일) 이용수 전 기술위원장의 브리핑을 중심으로 자세한 보도를 했었기 때문에 슈틸리케 감독의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성적이나 무색무취의 전술 문제 등은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 전 위원장이 슈틸리케 감독 취임 당시 "한 감독이 최종예선부터 본선까지 모두 책임졌으면 한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점은 과정을 지켜봤던 입장에서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만, 이 전 위원장이 동반 사퇴하면서 남긴 차기 지도자에 대한 문제에 대한 고민을 나눠볼까 합니다.
◆임기 채우지 못하고 경질의 칼날 피하지 못한 슈틸리케 감독
사임 위기에 왔던 지난 3월 슈틸리케 감독은 "나는 떠나면 그만이다"는 논란의 발언을 남겼죠. 어떻게 보면 슈틸리케 감독 입장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앞선 외국인 사령탑들도 남긴 것 하나 없이 떠났습니다. 굳이 남긴 것을 찾는다면 한국 축구의 뒤처진 행정 체계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개선이 필요하다는 문제 인식 확산이 있었네요.
한국 축구의 전설적 존재인 거스 히딩크 감독은 그나마 장기 합숙 등 K리그의 희생과 전폭적인 지원을 앞세워 2002 한일월드컵 4강이라는 성적을 냈죠. 이를 통해 박지성, 이영표 등 주역들의 해외 진출의 길을 열어줬네요. 그 덕분에 우물 안 개구리였던 한국 축구의 시스템이 조금씩 선진화의 길을 열고 유스시스템 구축과 육성의 기반도 마련됐습니다.
그러나 국가대표급 국내 지도자는 어떤가요. 양성은 고사하고 불같은 비판 여론을 일시적으로 면피하기 위한 돌려막기의 희생양이 되고는 했습니다. 체계적으로 프로팀과 연령별 대표팀을 거치며 경험을 쌓았지만 '독이 든 성배' 앞에서는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습니다. 때로는 결과에 상관없이 외적인 논란에 휘말려서 무너지는 경우도 있었고요.
이 때문에 현실적으로 8월 31일 이란과의 홈 경기, 9월 5일 우즈베키스탄과의 원정 경기를 누가 지휘를 할 것인지, 대한축구협회의 선택에 관심이 쏟아집니다. 축구협회는 이번에도 이 전 위원장에게 모든 해명을 맡기고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일단 절차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이 전 위원장이 슈틸리케 감독 영입 당시 교섭을 벌였던 당사자였기 때문입니다. 기술위가 대표팀 감독 선임에 독립적인 권한을 갖고 있어 그렇습니다. 이 전 위원장은 차기 대표팀 감독 선임 기준으로 당장 월드컵 최종예선 두 경기를 치러 본선에 올려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적어도 최종예선을 치열하게 경험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시간이 없다. 외국인 감독으로는 국내 선수 파악이 짧은 기간으로는 되지 않는다"며 '국내 지도자 불가피론'을 내세웠습니다.
국내 지도자라는 사견이 제시되기 무섭게 특정 후보군이 언급됩니다. 여기서 딜레마가 생깁니다. '2경기+본선'으로 시야가 좁혀지는 것이지요. 2경기만 치르고 본선에 올려놓는 임시 체제를 선택한 뒤 1년짜리 감독을 선임하기에는 이미 2014년 브라질월드컵 본선을 경험한 홍명보 전 항저우 뤼청(중국) 감독의 사례가 있어 부담이 꽤 커 보입니다. 2015년 6월까지 계약을 했던 홍 감독은 본선에서의 부진에다 개인적 문제가 겹치면서 계약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사임했습니다.
홍 감독은 20세 이하(U-20) 대표팀 감독을 시작으로 23세 이하(U-23) 감독을 맡아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 수확을 이끌며 순풍을 탔지만 2014년 6월 스스로 시한부 감독이라며 본선 진출을 이끈 최강희 감독의 뒤를 갑자기 이어받아 1년 만에 월드컵을 준비했습니다. '축구협회의 돌려막기'보다는 단순한 본선 성적 실패가 더 주목받으면서 재기하기 어려운 감독으로 낙인 찍혔고 결국 중국 시장으로 돌아 나갔지만, 항저우가 1년 만에 갑급 리그(2부리그)로 강등이 되면서 또 '실패자'라는 비아냥에 시달렸습니다. 실패는 팀이 했고 그 안에 감독이 있었는데 모든 것을 지도자가 뒤집어쓰는, 지극히 한국적인 시각에 걸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세평에 오르는 허정무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는 공식적인 제안을 받지 않았지만 몇몇 언론을 통해서는 "모든 것을 다 던지겠다"며 나름대로 준비 태세를 갖췄습니다. 2012년 인천 유나이티드 사령탑을 끝으로 5년 가까운 지도력 공백을 그는 "행정 경험을 쌓으면서 더 넓은 시야로 축구를 이해하게 됐다"고 합니다. 대표팀 전력을 끌어올리는데 행정경험이 무슨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말이지요.
◆본선 진출만 바라보는 단기적 사고…장기 계약 통한 믿음 부여는 어렵나
여기서 더 고민해야 하는 부분은 왜 '2경기+본선'이라는 이 위원장의 사견에 갇혀 있는가입니다. 후임 기술위원장은 이 위원장의 생각을 참고 사항으로만 판단하고 기술위원들과 고민 끝에 얻은 기준을 가지고 선임 작업을 벌이리라 생각됩니다. 다양한 의견이 나올 텐데 '본선까지의 임기 보장+2022 카타르 월드컵 최종예선과 알파(@는 본선)'는 안 되느냐는 것이죠.
이날 기술위원회에 참석했던 한 기술위원은 익명을 전제로 "사실 당면한 문제가 본선 진출이라 다음 월드컵까지 임기 보장을 통한 선임은 생각하지 못했다. 기술위나 축구협회는 최대한 보수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다만, 기술위원회는 A대표팀 말고도 여자 대표팀과 연령별 대표팀을 모두 관장하기 때문에 이 전 위원장이 브리핑을 통해 언급했던 '국가대표 사령탑 선발위원회'를 만드는 것에는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고 하더군요. 대표팀 사령탑 등의 문제에만 집중하면 다양한 의견 도출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일단 들여다보겠습니다. 한국을 멀리 따돌리고 일찌감치 본선 진출을 확정한 라이벌 이란은 카를로스 케이로스 감독이 두 번의 월드컵 본선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 입장에선 짜증이 날 정도의 실리 축구로 아시아 예선을 통과합니다. 브라질월드컵 본선에서는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특유의 스타일('질식 수비' 또는 '선 수비 후 역습')을 유지해 무승부를 목전에 두다가 경기 종료 직전 리오넬 메시(FC바르셀로나)에게 한 방 얻어맞고 패했지만,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 경기력을 케이로스 감독은 이번 3차, 최종예선에서 더 보완해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2경기를 남겨두고 본선 진출을 확정한 것이지요. 이란축구협회와 갈등이 표면화됐지만 어디까지나 케이로스 감독의 언론플레이 내지는 노련한 소통 방식이었고 능수능란하게 선수단과 협회, 팬심을 잡았습니다. 밑바탕이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 얻은 결과라는 점은 우리 입장에서는 부러운 부분입니다.
스페인을 이끌고 2008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08), 2010 남아공월드컵, 유로 2012 우승을 함께한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은 브라질월드컵에서 참패하며 자진 사퇴를 선택했습니다. 그렇지만, 스페인 축구협회는 그를 믿고 유로 2016까지 임기를 보장했습니다. 무려 8년입니다. 우승의 순간에도 그 이후에도 스페인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델 보스케 유임 당시 스페인 축구협회는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논리적인 설득으로 공감을 이끌었습니다.
물론 스페인의 사례가 정서적으로 우리와 맞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메이저 대회를 3회 연속 우승했으니 당연한 연임이겠고요. 또, "축구 강국이니 그럴 수 있다. 우리는 그러기에는 부정적인 여론이 만만치 않다"는 비관적인 태도도 한몫을 하고요.
◆국내 지도자 불가피론이라면 더 큰 미래를 보자
그렇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모험은 왜 못할까요. '축구팬'이 아니라 '국민'을 향한 설득과 이해로 지도자를 감싸주고 믿어주는 자세는 왜 보여주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장 월드컵이 좌절되면 암흑기가 찾아오기는 하지만 그다음 월드컵 진출 과정은 보이지 않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어차피 국내 지도자 선임이 불가피하다면 미래를 확실하게 보장하는 의지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실패한 지도자의 재기가 아니라 연속성 보장을 우선순위에 두고 대표팀을 운영하는 겁니다. '아시아 최종예선+월드컵 본선'이라는 계약을 체결한 슈틸리케 감독이 1년 10개월을 잘하다가 10개월이 흔들리면서 장기 계약에 대한 믿음이 떨어지는 것을 회복한다면 더 좋겠지만요.
김호곤 부회장은 "장기 보장이라는 생각 자체는 공감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우승(아시아 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을 해놓고도 잘렸던 경험이 있다. 그만큼 여론은 무섭다. 축구협회가 기술위원회의 의견이 도출이 되면 다양한 구상을 해야겠지만 이상적인 생각으로 느껴진다. 실패하는 감독을 다시 만들기에는 부담이 크지 않을까"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전했습니다.
축구 전문가들의 의견은 조금 갈립니다. 한준희 KBS 해설위원은 "개인적으로 (5년의 임기 보장은) 반대한다. 지금은 두 경기를 통해 본선에 올려놓는 감독 선임이 급선무다. 5년은 본선 진출 또는 러시아월드컵이 끝난 뒤에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유럽은 2년에 한 번씩 유로-월드컵이 반복되기 때문에 검증 시기가 일정하지만, 한국은 월드컵이 끝난 1년 뒤 아시안컵이 이어지니 애매하다는 겁니다.
이어 "설사 본선을 확정해 새로 선임해도 1년짜리 내지는 장기 계약을 하는 감독을 뽑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본선에서 3패를 하면 (비판 여론으로 인해) 홍명보 감독보다 더 충격을 받을 것이고 러시아 이후 보장도 되지 않을 것이다"고 그는 덧붙였습니다.
박문성 SBS 해설위원은 "당장 눈앞의 월드컵을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다. 시야를 넓게 보고 (장기 계약을) 보장한다면 지도자층이 넓어지지 않을까. 보장을 받은 지도자도 의욕이 생겨서 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 싶다. 선수들 입장에서도 '저 감독에게 5년의 임기가 보장된다면'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려는 동기부여도 생기지 않을까 싶다. 감독 한 명을 또 실패로 만들어 사장한다는 우려는 소극적이라고 본다"며 길게 활용하는 감독에 대한 필요성을 인정했습니다.
◆축구팬을 넘어 국민 향한 소통과 이해 필요하다
결국은 '국민 정서'가 정책 실행에 있어 관건일 듯합니다. 협회는 그동안 소통 부재라는 지적에 시달려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실무진이 열심히 움직여도 최종결정권자 내지는 수뇌부들의 판단이 오판이거나 불통이면 좋은 성과도 가려져 보이지 않았습니다. 연륜이 있지만 소통 방식이 노회하다는 지적이 나오고요. 선수단을 지휘했던 감독이나 그를 선임했던 기술위원장급 정도의 인사가 아니면 책임지는 자세가 보이지 않았고요.
소통 또는 축구협회 내부의 시스템이 문제일까요. 그동안 축구협회는 '축구팬'이라는 대상에 축구만의 화법으로 다가갔을 뿐 결정적인 순간에는 침묵하거나 여론의 흐름만 관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소극적인 자세로 인해 나름대로 장기 발전 정책을 만들고 실행하려 움직이는 수뇌부가 순식간에 '축구 적폐 세력이다'는 비아냥까지 듣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 12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 "2030년 월드컵은 한국, 중국, 일본, 북한이 공동유치를 했으면 좋겠다"는 발언도 정몽규 회장이 올해 초부터 구상하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대통령과 축구협회장의 발언을 받아들이는 무게감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지만 새삼 화제가 된 것을 보면서 묘한 느낌을 받습니다. 구상은 협회가 하고서 주목은 청와대가 받는 모습이 뭔가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통령을 통해 축구계 계획을 현실화, 정책화했다는 점은 인정해야겠지요.
청소년 대표 유망주였던 김태륭 KBS 해설위원은 "브라질월드컵 당시를 떠올려보면 장기 계약을 보장하는 감독은 쉽지 않다고 느껴진다. 월드컵이라는 타이틀에는 온 국민이 관심을 갖는다. 개인적으로는 브라질월드컵과 이번 사례를 겪으면서 한국에는 축구팬이 정말 적다는 생각이 들더라. 만약 장기 계약을 보장하고 러시아 본선에 갔어도 부진한 성적을 내면 누구나 '끌어내려라'고 하지 않을까"라고 했습니다.
결국, 온 국민이 감독이고 평론가인 국가대표 문제에 대해 바닥에서부터 소통 방식을 재검토하고 설명과 설득을 하는 방식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축구를 축구계의 일로만 가두기에는 어려운 현실입니다.
화법의 변화부터 수뇌부들의 적극적인 대국민 홍보와 설득을 통해 돌파하며 소모성 지도자 양산을 막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발상일까요. 또는 한국 축구 현실에서는 사치일까요. 지금 당장 어렵다면 본선 진출 후 다시 한번 큰 그림을 그려봤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지금은 분명 소통의 시대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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