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준기자] 이승엽(삼성 라이온즈)에 따라붙는 수식어는 많다. 소속팀 삼성의 팀명칭에 빗대 '라이언킹'이라고 부르는 것이 대표적이다. 한 시즌 56개의 홈런을 때려내 '아시아 홈런왕'이라는 타이틀도 붙었다. 태극마크를 달고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나 올림픽 등 국제무대에서 결정적인 한 방을 때려내 '국민 4번타자'라는 영예스러운 호칭도 들었다.
그렇다고 이승엽이 늘 정상에만 머물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승엽은 일본 프로야구 진출 후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경험했다. 언론과 팬들의 뜨거운 조명과 관심을 온몸에 받은 적도 있었지만 한물 간 선수 취급을 당한 가슴 아픈 시기도 있었다.
일본 생활을 접고 국내 복귀를 결정했을 때 많은 이들은 이승엽의 적지않은 나이와 내리막을 탄 기량에 의문 부호를 달았다. 그도 이제 나이를 먹어 전성기가 훌쩍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승엽은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여전히 삼성 타선에서 없으면 안 될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영원한 홈런왕 이승엽은 오늘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 일본 진출
조이뉴스24가 독자들에게 첫 선을 보인 지난 2004년. 이승엽은 일본에서 첫 시즌을 마쳤다. 그는 2003년 56홈런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우며 야구 인생의 초절정기를 보냈다.
왕정치가 갖고 있던 한 시즌 아시아 홈런 최고기록을 넘어선 이승엽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일본 진출에 성공했다. 지바 롯데 마린스와 2년 계약을 맺고 일본 무대로 건너갔다.
이승엽은 일본 진출 첫 해 썩 좋은 성적을 내진 못했다. 100경기에 나와 타율 2할4푼에 그쳤다.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긴 했지만 14홈런으로는 성에 찰 리 없었다. 한국과 일본의 야구 환경과 수준이 다르다고 해도 바로 그 전 해와 비교해 성적 차이가 너무 컸다.
그러나 이승엽은 이승엽이었다. 한 해 적응기를 마치고 2005년 본연의 모습을 되찾으며 일본에서의 성공시대를 열었다. 117경기에 나와 30홈런 82타점을 기록했다. 3할 타율에는 못미쳤지만 팀 중심타선으로 제몫을 했다.
이런 성적을 바탕으로 이승엽은 2006년 일본 최고 인기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일본 프로야구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요미우리는 이승엽에게 팀의 4번타자 자리를 맡겼다. 이승엽은 곧바로 팀과 당시 하라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그는 타율 3할2푼3리 41홈런 108타점의 눈부신 성적을 냈다. 타율과 홈런 부문 리그 2위에 올랐고 타점은 4위였다. 요미우리가 속한 센트럴리그 타격 전 부문에서 그는 정상급 기량을 보여줬다.
◆찾아온 슬럼프, 고통의 시간
이승엽의 2007년 전망은 밝았다. 자신이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더 큰 도전인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한 이야기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7년부터 이승엽의 부침이 시작됐다. 가장 먼저 한국에서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투병 중이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왼쪽 엄지에 염증이 생기는 부상을 당했다.
그는 이 때문에 타격을 정상적으로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성적도 하락했다. 30홈런으로 대포의 위력은 여전했지만 타율은 전년과 견줘 5푼 이상 떨어진 2할7푼4리에 그쳤다. 이승엽은 부진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즌 도중 스스로 2군행을 자처하기도 했다.
2008에도년 시즌 초반 반짝했을 뿐 부진은 그를 떠날 줄 몰랐다. 1군 경기 출전 횟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타율도 2할4푼8리로 떨어졌고, 1996시즌 이후 두번째로 두자릿수 홈런도 치지 못했다.
2008년 이승엽은 부진했지만 한국 야구팬들의 환호를 이끌어내는 인상적인 모습을 올림픽 무대에서 보여줬다.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야구대표팀이 전승 우승으로 금메달을 목에 거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대회 내내 부진에 빠져 있던 이승엽은 결승행의 고비였던 라이벌 일본과 준결승전에서 승부에 쐐기를 박는 2점홈런을 날린 것이다. 그 전까지 올림픽 기간 동안 1할대에도 미치지 못하는 극도의 부진으로 비난을 받았지만 이 홈런 한 방으로 그는 '역시 이승엽'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승엽은 당시 일본전이 끝난 뒤 눈물의 인터뷰를 했다.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던가를 짐작케 하는 장면이었다.
◆모두가 실패라고 할 때 다시 일어섰다
대표팀에서 기쁨과 환희는 잠시였다. 요미우리에서 이승엽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아시아의 홈런왕'이라는 말은 옛일이 됐다. '계륵'이라는 달갑잖은 꼬리표가 그를 따라다녔다.
이승엽은 요미우리에서 보낸 마지막해인 2010년 56경기에 나와 타율 1할6푼3리 5홈런 11타점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그리고 또 다른 도전과 명예회복을 위해 오릭스 버팔로스로 이적했다.
하지만 오릭스 시절도 요미우리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2011년 122경기에 출전해 15홈런을 치긴 했지만 타율은 2할1리에 머물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승엽의 시대는 끝났다'고 입을 모았다. 성적이 받쳐주지 않자 관심에서도 점점 멀어졌고, 그렇게 이승엽은 자신의 시대를 마감하는가 했다.
그러나 이승엽은 오뚜기처럼 일어났다. 국내 복귀를 선언한 뒤 친정팀 삼성 유니폼을 다시 입었다. 그의 국내 유턴에 대해 마냥 반기는 분위기만 있던 건 아니다. 일본 진출 전 기량을 다시 보여줄 수 있느냐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이 분명 많이 있었다.
이승엽은 묵묵히 후배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2012시즌을 준비했다. 8년 만에 다시 돌아온 국내 프로야구였다. 2012시즌 이승엽은 팬들이 다시 그의 이름을 연호하도록 하는 활약을 펼쳤다. 126경기에 나와 타율 3할7리 21홈런 85타점을 기록하며 소속팀 삼성의 두 번째 통합우승에 큰 도움을 줬다.
2013년에는 일본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 슬럼프가 찾아왔다. 타석에 나가면 헛손질하기 일쑤였고 홈런과 타점 생산 능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다. 타율 2할5푼3리 13홈런 69타점이라는 성적표를 받았다. 일본 시절을 제외하고 국내 무대에서 거둔 성적 중 가장 좋지 않았다.
슬슬 은퇴 이야기가 나올 만했다. 하지만 이승엽은 포기하지 않았다. 올 시즌 그는 127경기에 나와 타율 3할8리 30홈런 101타점으로 다시 자신의 존재감을 떨쳤다. 아무리 올 시즌이 '타고투저' 현상이 심했다고는 하지만 한국나이로 마흔살을 눈앞에 둔 타자가 이런 성적을 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삼성은 올 시즌 신구 전력이 조화를 이루며 정규리그 4연속 우승을 했다. 물론 그 영광을 이승엽도 함께 했다. 이승엽은 이제 삼성의 통합우승 4연패에 힘을 실어주려고 한다. 이제는 팀의 중심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화려한 조명을 받는 위치에 있지도 않지만 그의 꾸준함은 후배들에게 가장 본받고 싶은 귀감이 되고 있다.
이승엽은 은퇴 시기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도 잘 알고 있다. 그라운드에서 동료들과 함께 플레이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래도 이승엽은 야구장을 떠나는 그 날까지 쉼없이 훈련하며 타석에 들어서면 안타와 홈런을 노릴 것이다.
이미 자신이 작성한 프로야구 통산 홈런 부문 1위뿐 아니라 팀 선배인 양준혁(전 삼성)이 갖고 있는 각종 타격 최다 기록에 한 발자국씩 다가가고 있다. 이승엽은 종목을 떠나 한국 스포츠사에서 그 빛을 잃지 않을 큰 별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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