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벌써 2년이 지났다. 제13회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12번째 보조사제'(감독 장재현)를 처음 본 일이. 극장을 나오면서는 프로그램북을 뒤적인 뒤 최부제 역 주연 배우의 이름을 포털사이트에 검색했다. 이학주라는 이름이었다. 낯설었다. 당시만 해도 '밥덩이'라는 단편과 '12번째 보조사제', 단 두 편의 영화만이 공식 프로필란을 채우고 있었다.
20여분 분량의 짧은 영화를 보는 내내, 신선한 마스크와 과함이 없는 연기에 자꾸 눈이 갔다. 유약함과 카리스마가 동시에 비치는 눈이 특별해보인다고 느꼈고, 로만칼라가 저렇게나 잘 어울리는 배우가 또 있을까 생각했다. 물론 당시는 이 영화가 '검은 사제들'로 장편화되기 전, 그러니까 사제복을 입은 강동원의 모습을 보기 이전이긴 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두 영화를 본 순서가 뒤바뀌었다 하더라도 그 날의 감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지난 2015년 방영된 tvN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 속 순애(김슬기 분)의 철부지 동생 경모가 '12번째 보조사제' 속 이학주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드라마를 중반까지 보고 나서야 '낯이 익다'는 생각에 이름을 검색했더니, 그 이학주가 맞았다. 영화에서와는 달라도 한참 다른 이미지였다. 배역 선택에 있어 아주 의외의 행보라 생각했지만, 나름대로 어울리는 캐릭터로도 보였다.
그리고 이학주와 가까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그가 지난 4월 개봉한 영화 '날, 보러와요'(감독 이철하)의 동식 역을 맡아 한창 관객을 만나고 있었을 때다. 영화에서 이학주는 여주인공 강수아(강예원 분)가 강제 구금된 사설정신병원의 보호사 동식 역을 연기했다. 극 중 동식은 반전의 키를 쥔 인물인 동시에, 병원에서 유일하게 인간미를 보여주는 캐릭터다. 이학주에겐 그간 출연한 상업영화 속 배역들 중 가장 비중이 큰 인물이기도 했다.
"아직 내가 연기한 장면들을 잘 못 보겠다"고 웃으며 입을 연 이학주는 '날, 보러와요'의 촬영 현장을 돌이키며 "하고싶은 대로, 자유롭게 연기하게 해주셔서 힘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매니지먼트사 SM C&C에 함께 몸 담고 있는 선배 배우 강예원과의 호흡에 대해선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잘 대해주시더라"고 웃으며 덧붙였다.

인터뷰 중 유독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학주가 지닌 독특한 기운이었다. 처음 인사를 나누고 두어 질문을 던질 때까지만 해도 분명 낯을 가리는 것 같았는데,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본색'이 드러났다. 멋쩍음과 엉뚱함이 뒤섞인, 하지만 이내 상대를 웃음짓게 하고야 마는 유머가 그것이었다.
그는 웹드라마 촬영기를 돌이키며 "학창시절에 거의 싸움을 해본 적이 없어 액션스쿨에 가니 힘들더라"고 토로하는가 하면, "나는 '긴장덩어리'라서, 비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긴장이 찾아오면 그 때의 냄새를 기억한다"고 고백해 웃음을 주기도 했다. 한 마디로, 하나도 안 웃긴 표정으로 웃긴 말을 잘도 내뱉는 사람이었다. 웃긴 말들이 쌓여갈수록, 그를 향한 이상한 친근감도 함께 누적됐다. 그렇다. 이학주는 요즘 말로 '입덕을 부르기 딱 좋은' 상인 것 같다.
지난 7일에는 브라운관에서 이학주의 활약을 압축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KBS 1TV '독립영화관'이 전주국제영화제 기획전을 편성한 가운데, 이학주는 세 편 중 두 편의 영화에 얼굴을 비췄다. '12번째 보조사제'와 '폭력의 틈'이 그가 출연한 단편들이었다. 방송 후 SNS엔 이학주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심심치 않게 게시됐다. 특히 '검은 사제들'의 원작으로 화제가 됐던 '12번째 보조사제'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다. 제12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단편의 얼굴상'을 안겨주기도 했던 이 영화는 이학주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12번째 보조사제' 이후 처음 겪는 일들이 많았죠. 단편 영화를 같이 하고 싶다는 연락도 많이 받았고, 만나보자는 전화도 많았어요. 조금 들떠있었죠. '단편의 얼굴상'을 받았을 때는 이후 조금 가라앉아 있던 시기였어요. '재미는 있는데 더 재밌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주위에서 '잘 될 거다'라고들 했는데, 잘 되긴.(웃음) 아무 일도 들어오지 않던 때였어요. 오디션도 보고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토익 학원도 다녔을 정도니까요."
'토익 학원'이라는 친숙한 네 글자가 뇌리에 남았다. 이학주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07학번이다. 전공을 연기로 택했을 정도이니 배우의 꿈을 더 끈질기게 꿨을 것이라 예단했는데, 그가 연기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예상보다 즉흥적이었고 또 흥미로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연극반에 있었어요. 후레쉬맨과 백설공주가 만나는, 누가 썼는지는 잘 모르겠는 희곡이 제가 다닌 학교에 전해내려져오고 있었는데,(웃음) 1년 간 모여 그 퍼포먼스를 함께 작업하는 것이 재밌더라구요. 공부는 개인이 하는 일이니 협업은 게임을 할 때나 한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팀플레이'라는 것을 하게 된 느낌이었어요. 사실 신문기자나 방송 PD와 같은 언론인이 되고 싶다는 꿈도 있었는데, 입시 때 목표했던 점수가 나오지 않아 원했던 곳에는 가지 못했죠. 사실 고등학교 때니까 꿈이 명확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한양대에 연영과가 있다는데 가볼래?'라고 제안하셨어요."
공부를 잘 하는 편에 속했던 이학주는 실기 전형 없이 성적우수자로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처음엔 어머니가 연기 활동을 반대했지만, '12번째 보조사제' 촬영장에 오셨던 뒤로는 마음을 바꾸셨다는 것이 이학주의 설명이다. 이학주는 "아마도 '얘가 취미 활동 삼아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구나. 고생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그가 털어놓은 연기 입문기란 조금은 엉뚱했고, 확실히 우연적이었다. 이학주는 연기를 가리켜 "처음으로 발견한 재밌는 것"이라 표현하면서도 "재미는 흥미일 뿐이니, 언젠가 없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면 내가 무너질 수 있으니 배우라는 직업의 의의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어쨌든 열심히 하는 것과 재밌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뭐라 말해야 할까요. 좋은 영화들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잖아요. 영화를 한다면 제가 어떤 직업군, 적합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계층, 어떤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면 오랫동안 괜찮을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죠. 그런 배우가 된다면, 속도가 늦든 빠르든 오래 연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현재 이학주는 OCN 드라마 '38사기동대'의 안창호 역을 맡아 촬영 중이다. 오는 6월18일 첫 방송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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