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준기자] 한국야구는 올 한 해를 기분좋게 마무리했다. 시즌 후 열린 WBSC 주최 '2015 프리미어12'에서 김인식 감독이 이끄는 한국야구대표팀이 초대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김인식호는 당초 우승 기대가 높지 않았다. 8강까지만 올라도 다행이라는 얘기가 대회 직전까지 나왔다.
대표팀 구성에서 역대 최약체라는 평가가 나왔다. 10구단 체제로 경기수가 늘어난 KBO리그 일정으로 대회 준비 기간이 짧았던 것도 대표팀 전력을 저평가하는 요소가 됐다. 그러나 김인식호는 이런 우려를 걷어내고 당당히 우승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대표팀의 영광 뒤에는 보이지 않은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 이들이 있다. 김시진 전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팀장을 맡은 프리미어12 전력분석팀도 그 중 하나다.
◆개막전 일본에 패배, 오히려 득됐다
대표팀 전력분석팀장을 맡았던 김시진 전 감독을 자택이 있는 인천에서 만났다. 프리미어12와 관련한 뒷얘기들이 궁금해서다.
김 전 감독은 "선수들이 정말 잘 뛰었다. 김인식 감독님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도 선수단을 잘 이끌었다. 이런 부분이 우승의 원동력이 됐다"며 "좋은 성과를 냈기 때문에 전력분석팀은 묻어가는 것"이라고 껄껄 웃었다.
그는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코칭스태프의 일원으로 대회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팀원들과 함께 밤을 세워 만든 전력분석 자료가 우승이라는 값진 열매를 맺은데 도움이 됐다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기분이 뿌듯하다.
전력분석팀은 처음부터 일본전에 초점을 맞췄다. 김 전 감독은 "개막전이 정말 중요했다"고 얘기했다. 그는 "일본과 개막전을 패한다고 하면 대만으로 이동해서 치르는 조별예선 2, 3차전 도미니카공화국과 베네수엘라전이 무척 힘들어질 거라고 봤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유는 있었다. 특히 베네수엘라는 대회 개막 직전 참가선수 명단이 크게 바뀌었다. 김 전 감독은 "대회 직전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던 베네수엘라 대표팀 선수들의 영상을 입수했고 이를 토대로 분석작업을 마쳤다. 그런데 13명이나 교체됐다"며 "그 때는 정말 난감하더라"고 힘들었던 순간을 돌아봤다.
◆피자와 맥주, 야식이 아닌 주식?
한국은 지난달 8일 삿포로돔에서 열린 일본과 프리미어 개막전에서 0-5로 완패했다. 김 전 감독이 우려하던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 선발투수 오타니 쇼헤이(니혼햄)에 한국 타선이 철저히 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도미니카공화국과 베네수엘라를 연파하고 개막전 패배 충격을 딛고 일어섰다. 김 전 감독은 "일본전 패배 소식을 대만에서 들었다"고 했다. 전력분석팀은 대표팀보다 하루 먼저 움직였다. 상대팀 경기를 미리 살핀 뒤 전력 분석 자료를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정서상 아무래도 한·일전 결과가 중요하지 않나"며 "팀이 졌기 때문에 전력분석에서도 뭐가 잘못되고 부족한 부분이 있었는지 다시 한 번 따져보게 됐다"고 말했다. 김 전 감독은 "우리(전력분석팀)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마 선수단도 개막전 일본전 패배가 오히려 하나의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잠자고 있던 투지와 열정을 끌어내는데 개막전 패배가 오히려 도움이 됐다는 의미다.
전력분석팀 업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당 경기를 마냥 지켜보기만 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기가 끝났다고 일이 함께 마무리되는 것도 아니다. 전력분석팀 업무는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김 전 감독은 "야구장에서 숙소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노트북부터 켜게 된다"며 "경기 영상을 다시 돌려보는 일이 첫 순서다. 저녁을 거르는 경우가 많아 숙소에서는 피자에 맥주를 늘 시켜놓았다"고 했다. 그는 "솔직히 영상을 반복해서 보다 잠깐 존 적도 있었다"고 웃었다.
◆감격적 우승의 기쁨, 그리고 여운
김인식호가 대만에서 승승장구하며 4강 진출에 대한 기대를 높이자 전력분석팀도 힘을 냈다. 김 전 감독은 "분석이 끝났다고 해도 자료를 바로 대표팀에 넘기진 않았다"며 "전력분석팀에서 자체 평가와 논의 그리고 시뮬레이션을 다시 하는 시간을 꼭 거쳤다"고 했다.
한국의 준결승 상대로 일본이 정해졌다. 개막전 패배를 되갚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김 전 감독은 "대표팀이 철저하게 당했던 투수 오타니(니혼햄)에 대한 자료를 포함해 일본 선수들에 대한 데이터와 분석을 다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오타니가 마운드를 내려간 뒤라면 타자들이 다른 투수의 공을 충분히 공략할 것이라고 봤다"고 사실상 '오타니 이후'를 대비한 전략을 짜뒀음을 알렸다.
한국은 또 다시 오타니 공략에 실패하며 8회까지 0-3으로 끌려갔다. 김 전 감독은 경기가 열린 도쿄돔이 아닌 호텔 숙소에서 TV중계를 통해 경기를 지켜봤다. 전력분석팀은 해당 경기가 열리는 당일 구장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착잡했다. 개막전에 이어 또 다시 일본에게 완패를 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오타니가 마운드를 내려갔다"며 "결과론이지만 그 때 '이대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김인식호는 9회초 믿어지지 않은 대역전에 성공했다. 대거 4점을 뽑아 경기를 뒤집었고 일본을 극적으로 꺾고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한국은 결승전에서 미국을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김 전 감독과 전력분석팀도 이번에는 결승전이 열린 도쿄돔으로 직접 갔다. 그는 "일본에서 당초 생중계로 예정된 결승전을 녹화중계로 바꾸는 바람에 인터넷을 접속해 경기를 봤다"며 "7-0으로 리드를 하는 순간 중계창을 닫고 노트북 전원을 껐다. 우승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 길로 바로 도쿄돔으로 갔다"고 웃었다.
우승 후 한 달 이상의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김 전 감독은 지금도 함께 일한 전력분석팀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이종열 SBS 스포츠 야구해설위원, 안치용 KBS N 스포츠 해설위원, 채창환 전 한화 이글스 기록원 등이 전력분석위원으로 대회 기간 전후로 김 전 감독과 함께 했다.
김 전 감독은 "이 해설위원은 중계 일정까지 잡혀있는 가운데도 전력분석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고 했다"며 "또한 한국이 속한 B조가 아닌 A조 전력분석을 담당했던 팀원들은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한국은 A조에서 올라와 8강 이후 만날 팀으로 대만과 쿠바를 예상했다. 정작 한국은 A조에 속한 팀들 중에서는 쿠바와 8강전에서 만났을 뿐이다. 대만은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했다.
김 전 감독은 "우승을 이끌어낸 원동력은 당연히 그라운드에서 직접 뛴 선수들"이라며 "여기에 김인식 감독님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의 역할을 무시하면 안된다"고 했다. 또한 그는 "대회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한 한국야구위원회(KBO) 관계자와 전력분석 작업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한 야구통계전문회사인 스포츠투아이 관계자들도 프리미어12 우승을 도운 주역들"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내가 한 역할은 거의 없다"며 "내가 힘을 보탠 부분은 미미하다"고 여러 번 말했다. 수십 명이 넘는 선수단을 하나로 이끌며 팀을 꾸린 뒤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한 김인식 감독처럼 김 전 감독도 숫자는 얼마 되지 않지만 전력분석팀을 이끌었다. 한국이 우승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음지에서 자양분 역할을 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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