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필기자] 덥고 습한 날씨에 혀를 내두르며 지내고 있는 중국 우한에서의 2015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동아시안컵이 남자부 최종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여자부는 북한이 2연속 우승을 차지하고 한국이 준우승으로 마무리됐습니다.
아쉬움이 남지만, 다음을 위한 발전이라고 생각하면 나쁠 건 없습니다. 선수들은 한결같이 "아쉽지만, 많이 배웠다", "북한이 월드컵 16강전에서 싸웠던 프랑스보다는 조금 약했다"라며 다시 만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여자 대표팀은 한 번 무너지면 다음에는 반드시 넘는다는 것을 이번 동아시안컵에서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내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예정된 2016 리우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 작은 기대를 합니다. 2장의 출전권에 월드컵 준우승국 일본, 8강 중국, 난적 호주, 금지 약물 복용이 드러나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풀린 북한에 베트남, 태국까지 빡빡하지만 담대하게 도전해 성공과 실패 중 하나를 얻는 것도 한국 여자 축구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같은 달에는 한국 축구 역사에 큰일로 남을지 모르는 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월 26일로 예정된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 선거입니다. 5선에 성공한 제프 블래터 회장이 측근 비리 등 부패 스캔들을 견디지 못하고 사퇴하면서 무주공산이 됐습니다.
현시점에서는 프랑스 축구 레전드인 미셸 플라티니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이 유력한 후보로 보입니다. 블래터 회장의 5선을 막지 못했던 알리 빈 알 후세인 요르단 왕자, 무사 빌리티 라이베리아 축구협회장, 디에고 마라도나 아르헨티나 전 대표팀 감독, 지쿠 전 브라질 대표팀 선수 등이 출마를 예고했지요.
그리고 또 한 명,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입니다. 정 명예회장은 출마 가능성을 내비친 뒤 캐나다 여자 월드컵, 뉴질랜드 20세 이하(U-20) 월드컵,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등을 방문해 분위기 파악에 나섰죠.
7일에는 우한도 찾았습니다. 정 명예회장이 우한을 방문을 한다고 할 당시 국내 취재진은 '취재해야 할 대상이 한 명 더 늘었구나'라며 고뇌에 빠졌습니다. 남자, 여자 대표팀이 호성적을 내고 있어 훈련, 경기 취재에 이미 녹초가 돼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죠. 그러나 정 회장의 일정은 쉽게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경기 관람 여부도 명확하지 않았고요. 축구협회도 명예회장 측의 일이라 확실하게 파악을 하지 못했습니다.
정 명예회장의 동선에 대한 의문은 8일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과 취재진의 오찬 자리에서 풀렸습니다. 축구협회 관계자는 "정 명예회장이 오늘 오전 비행기로 한국으로 떠났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즉 1박 2일로 우한에 와 EAFF 가맹국 수장들이 모인 시내 한 숙소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돌아갔다는 겁니다.
정 명예회장은 이날 우승팀이 결정되는 여자부 한국-북한전을 관전하려고 했지만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며 사람을 만나고 있어서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고 합니다. 오는 12일에는 UEFA 슈퍼컵이 열리는 조지아로 향하고 17일 프랑스 파리에서 회장 출마 선언을 할 예정입니다.
무엇보다 정 명예회장의 사촌 동생인 정 회장이 이날 취재진에 "우리나라에서 FIFA 회장이 나온다면 축구계는 물론 국가의 위상이 올라갈 것이다. 나도 외국에 바쁘게 돌아다니며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라며 확실한 지원사격을 예고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정 회장은 2013년 1월 축구협회장에 당선된 뒤 해외 다수의 국가를 돌며 자신의 얼굴을 알리는 데 힘써왔죠. 아시아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FIFA 집행위원에 도전하려 했고요. FIFA 집행위원은 유럽 8명, 아시아·아프리카 각 4명, 남미·북중미 각 3명, 오세아니아 1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올 4월 아시아 축구연맹(AFC) 총회에서는 2년 임기의 FIFA 집행위원 한 자리를 노리고 나섰지만 낙선의 쓴맛을 봤습니다.
국제 축구계의 정치 놀음에 물을 먹은 겁니다. 의미가 있다면 집행위원 선거를 앞두고 괌 축구협회가 선거 규칙을 바꾸자는 것에 반대 의사를 확실히 밝히며 개혁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다는 겁니다. 당시 해외 유수 언론도 AFC의 의사 결정 구조를 비꼬면서 정 회장의 반대 행보를 자세히 보도하기도 했고요.
이 때문에 차기를 내다보며 달리려는 시점에 사촌 형인 정 명예회장이 FIFA 회장을 하겠다며 나왔으니 처지가 난처해지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몇 차례 정 회장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 참석하는 행사마다 만남을 기다렸지만, 일찍 자리를 떠나거나 측근들이 만류하는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기다리던 정 회장의 FIFA 회장 선거전에 대한 생각이 이날 나왔으니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 명예회장과의 이견 조율도 끝났다고 판단하기에 충분했고요. 원론적인 답변이라고 보기도 어려웠습니다. 동석한 축구협회 한 관계자는 "정 명예회장이 국제, 정 회장이 국내와 아시아 일부를 책임지고 움직이지 않을까 싶다"라며 투 트랙 접근을 이야기했습니다.
기자는 잠시 옆에 앉았던 정 회장에게 "아시아 몫의 FIFA 집행위원 쿼터가 더 늘어나야 하지 않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정 명예회장의 회장 선거와 정 회장의 집행위원 재도전에 대한 생각을 우회적으로 물은 셈이지요.
그러자 정 회장은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 "블라터 회장이 AFC 몫 집행위원을 2명 더 늘려준다고 했는데, 그렇게 될지는 지켜봐야 한다. FIFA 수입의 70%는 아시아, 아프리카, 북미에서 나온다고 하더라. 스폰서만 봐도 유럽은 1개고 나머지가 아시아나 북미 아니냐. 아시아와 아프리카, 북미의 힘이 늘어나야 한다. 유럽 집행위원이 8명이나 되는데 이런 구조는 서서히 깨져야 한다"고 말이죠.
정 회장을 본 이래 가장 말을 조리 있고 깔끔하게 하던 순간이었습니다. '한국인 FIFA 회장'과 'FIFA 구조 변화' 대한 언급을 한 것 자체로만 봐도 사촌 형을 확실히 돕겠다는 강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교통정리가 됐으니 정 명예회장의 도전과 정 회장의 지원이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물론 상황은 녹록지 않습니다. 정 명예회장은 4년 만에 국제무대 복귀에 나서는 도전자입니다. 2011년 AFC 몫의 부회장 선거에서 알리 왕자에게 패해 5선에 실패했습니다. 영향력 회복이 절실합니다. 정 회장은 지난 AFC 집행위원회에서 EAFF 가맹국인 괌의 느닷없는 선거규정 개정 주장에 당하고 말았고요.
EAFF 내의 협력을 기반으로 플라티니 지지로 기울어진 AFC에서 얼마나 동의를 끌어내느냐가 재도전의 당락을 결정할 것 같습니다. 지금 두 사촌 형제에게 필요한 것은 중국, 일본을 꺾은 여자축구대표팀의 대담한 도전 정신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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