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김기덕 감독에겐 현재 영화계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제자들이 있다. 지난 2011년 영화 '풍산개'로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모두 얻었던 전재홍 감독도 그 중 한 명이다. '김기덕 사단'으로 불리며 영화계의 관심을 모았던 전재홍 감독은 자신의 제작사 '전재홍 필름'의 이름을 건 신작 영화 '기프티드(Gifted)'를 들고 제19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기프티드'는 올해 영화제의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 초청됐다.
영화제가 한창인 지난 7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 전당에서 전재홍 감독을 만났다. 그는 이번 영화제에 참석한 김기덕 감독의 오픈 토크 행사에도 모습을 드러내 스승과 함께 했다. 전 감독은 "스승님이 있다는 것도 좋고, 제 영화로, '전재홍 필름'으로 부산에 오는 것도 좋다"고 알렸다.
"감독님과 같은 영화제에 있는 것만으로도, 같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아요. 영광이죠. 제 힘든 시기도 많이 보셨고 저를 누구보다 격려해주는 분이에요. 제 이름을 걸고 처음 부산에 왔는데 감독님의 '일대일' 같은 영화와 한 영화제에서 함께 상영되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의 영화 '기프티드'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에게 실직 사실을 숨겨오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연이어 구직에 실패한 남자는 카페 인수를 준비하다 애인의 실직 사실을 안 여자로부터 이별 선고를 받는다.
여자의 남동생은 남자에게 자동차를 훔치는 일을 함께 하자고 제안하고, 돈이 급한 남자는 차 문을 쉽게 따는 재능을 이용해 자동차를 훔친다. 그러다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인 남자는 순간 쾌락을 느끼며 제목처럼 자신이 살인에 재능이 있다고 믿게 된다.
"잔인한 영화, 색깔이 있는 영화를 살인자의 시점에서 만들고 싶었어요. 전형적인 미치광이를 그린 영화보다는 저도 모르는 재능을 통해 흘러가는 영화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아메리칸 사이코' '드라이브' 등 외국에 비슷한 색깔의 영화들이 있는데, 한국에서도 장르를 개척하고 싶어요. 흥행을 위해 기획된 영화들이 너무 많지만 저는 아직 젊으니 제 돈으로라도 여러 장르의 다양성 영화를 만들고 싶고요."
전작 '풍산개'(2011)와 '아름답다'(2007) 등에 이어 이번에도 전 감독 영화의 색채는 어둡다. 그는 "밝은 영화는 아직까진 저에게 안 맞는 것 같다"며 "제 인생이 밝아보일 수는 있지만 영화를 할 때는 어두운 작업이 좋다. 그 두 성향이 서로 섞인 결과물이 나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영화의 남녀주인공으로 분한 김범준과 배정화는 전재홍 감독이 시나리오를 구상하면서 이미 캐스팅을 확정한 배우들이다. 김범준은 평범한 실직 청년의 의기소침한 표정에서 살인의 쾌감에 젖어 희번덕대는 눈빛까지 다채로운 얼굴을 보여줬다. 배정화는 평범하면서도 속물적인 여인으로 분해 극단적 상황에 내던져진 연기를 소화했다.
감독은 "'기프티드'는 김범준과 배정화를 생각하며 쓴 시나리오"라며 "재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배정화를 만났는데, '이 여배우와 꼭 영화를 찍어야겠다' 생각했다. 김범준은 전작에 이어 함께 작업했는데, 솔직히 저의 페르소나에 가깝다"고 고백했다.
"저는 늘 좋은 배우와 일했어요. '아름답다'의 차수연과 이천희, '풍산개'의 윤계상과 김규리에 이어 이번에도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와 영화를 만들었죠. 최고의 운인 것 같아요. 배우의 인지도나 명성이 중요하지는 않아요. 서로 생각이 맞아야 하는거죠. 작업이 힘들어도 이런 행운이 있어서 좋아요."
전재홍은 누구보다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엄격한 감독이다. "고쳐야 할 부분만 보일까봐 전작을 다시 보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다. 그래서 그에겐 지난 작품보단 현재 진행중인 작업과 다음 작품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는 "이전 영화들은 마치 앨범 속 사진들 같다. 잘 안 꺼내보게 되지 않나"라고 말한 뒤 "과거는 과거일 뿐, 미래가 중요하다. 아마 앞으로도 이전 영화들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그는 '풍산개'를 함께 작업한 배우 윤계상과 작업을 돌이키며 현장에서 자신의 모습이 몹시 까다롭다고도 알렸다. 그는 "윤계상이 나를 악마라고 불렀었는데 이번 현장은 더 타이트했다"며 "촬영 전 거의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배우들도 전 대사를 외우고 들어갔다"고 돌이켰다.
"저는 늘 요구하는 게 많은 감독이에요. 배우들도 몸 관리를 잘 해줬고 정신적으로도 트레이닝을 했죠. 캐릭터가 세니 거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눠 서로 공감하기에 이르렀어요. 모든 장면의 움직임을 연극 연습하듯 오랫동안 리허설했고요. 힘든 과정을 따라와 준 배우들에게 고맙죠. 함께 한 다른 배우들도 그랬지만 김범준과 배정화 역시 유명세보단 연기를 갈망하는 배우들이었어요. 그런 배우들과 영화를 찍는 건 행운이죠."
김범준이 연기한 극 중 남자는 번번이 구직 면접에서 물을 먹으며 자신의 쓰임새에 혼돈을 느끼는 인물이다. 딱히 잘 하는 것도, 자신감도 없는 남자는 자신이 뛰어들어 잘 할 수 있는 일에 갈망을 느끼던 차에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는 살인이야말로 자신의 타고난 재능이라고 믿게 된다. 남자에게 실제로 남다른 살인 기술이 있는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
김범준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언급한대로, 극 중 인물은 영화에 대한 감독의 열망을 비틀어 담은 캐릭터이기도 하다. 물론 영화계가 바라보는 전재홍 감독의 재능은 영화 속 인물의 아리송한 자신감과 달리 확연하다. 하지만 감독의 설명과 함께, 살인을 재능으로 믿고 싶은 남자와 영화를 천직으로 믿고 싶은 감독의 모습은 자연스레 병치된다.
"첫 영화 '아름답다'가 미에 대한 영화였다면 '기프티드'는 제 고민에 대한 영화에요. 고민을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가 제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죠."
차기작은 다음 웹툰 '0.0 메가헤르츠'를 영화화하는 작품이다. 시나리오 단계는 마무리됐고 캐스팅이 진행 중이다. 감독은 "'기프티드'가 끝났으니 또 새 작품 작업이 탐이 난다"며 "기존 공포와는 다른 장르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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