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필기자] 지난해부터 피겨스케이팅에 입문한 박나정(7) 어린이는 '피겨여왕' 김연아(23)가 시니어 무대에 데뷔해 보여준 모든 연기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봤다고 한다. 어떻게든 따라가기 위해 빙판에서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도 머릿속에서 김연아의 연기를 그리고 있다.
나정 양의 집은 대구광역시다. 처음 대구에서 피겨를 시작했지만 그래도 어린 선수들이 많이 몰리고 우수한 강사도 많은 수도권이 적합하다고 판단한 나정이의 부모님이 친척이 있는 경기도 성남으로 올려보냈다. 자영업을 하고 있는 나정이 부모님은 토, 일요일 번갈아 성남으로 올라와 과천시민회관 빙상장으로 나정이를 데려가 연습시키고 있다.
그야말로 생고생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딸의 피겨 기량 발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나정이의 아버지는 "아직 다른 선수들의 학부모와도 친해지지 못했다. 정보를 얻는 것이 많지 않아 애를 먹고 있지만 잘 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라고 말했다.
기량이 아직 초보 수준이니 발전 가능성을 확인하고 미리 관리에 들어가는 스포츠 에이전시의 눈에도 들지 못하고 있다. 조금 더 앞선 선수들은 잠정적인 경쟁자인 나정이에게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모든 것을 나정이 홀로 감내해야 한다. 그래도 피겨를 한다는 마음 하나로 즐겁게 연습하고 있다. 나정이는 "연아 언니가 뛰는 트리플 5종 점프를 꼭 해내겠다"라며 당차게 마음을 다잡았다.
고액의 빙상장 대관료는 그나마 부모님이 자영업을 통해 번 돈으로 버티고 있다. 김연아처럼 성공하면 좋겠지만 잘 되지 않아도 건강하게 자라 꿈 앞에서 좌절하지 않는 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 나정이 부모님의 마음이다.
나정 양처럼 김연아로 인해 피겨에 입문하는 어린 선수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국가대표만 봐도 '김연아 키즈'로 불리는 박소연(16, 신목고), 김해진(16, 과천고), 최다빈(13, 강일중), 최휘(15, 수리고) 등 발전 가능성 있는 어린 선수들이 김연아를 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양적인 성장은 계속되고 있지만 이들을 키울 수 있는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질적인 여건은 좋아졌을까. 2010년 김연아가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경이적인 점수를 얻으며 금메달을 획득한 뒤 여기저기서 피겨에 관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인프라 확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신기루처럼 피겨에 대한 환상만 왔다가 사라졌다. 일부 지자체에서 빙상장 시설 개선을 하기는 했지만 빙상장 신축 계획은 그 어디에도 없다.
현실은 더디다. 지자체의 각종 조례에 묶여 어린이 선수들에게도 거액의 비상장 대관료를 여전히 받고 있다. 또, 빙질이 다른 쇼트트랙, 아이스하키 등 다른 종목들과 어우러져 사용하다보니 시간을 배정 받기도 하늘의 별 따기다. 새벽에 빙상장을 가면 심심치 않게 피겨 연습에 몰두하는 어린 선수들을 보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니다.
그 사이 시간이 훌쩍 지나 김연아는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있다. 김연아 역시 또 다시 메달을 획득하기 위해 연습에 몰두하다 오른쪽 발등뼈를 다쳤다. 멍이 든 수준이지만 올림픽 예행 연습으로 삼으려 했던 그랑프리 시리즈 출전은 무산됐다.
여기저기서 피겨 전용 빙상장만 있었어도 부상이 없었을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피겨 전문가들은 김연아의 부상에 대해 딱딱한 빙상장의 빙질이 한 몫 했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김연아 역시 어린 시절 새벽까지 연습하다 고관절 부상을 당하는 등 몸을 혹사당한 경험이 있다. 올림픽, 세계선수권 금메달 등으로 개인적 영광은 얻었지만 온 몸 구석구석에 배인 부상의 흔적은 완벽하게 치유되지 않았고 반복을 거듭하고 있다.
소치 올림픽을 앞두고 김연아는 지난달 30일 대한체육회가 주최한 D-100 국가대표 임원, 선수 기자회견에 참석해 "통증이 많이 사라져 이제 점프 연습을 소화할 수 있다. 몸 상태는 전체적으로 정상의 70% 수준이다"라고 전했다.
김연아의 주치의인 강서솔병원 나영무 대표원장은 "김연아는 이전부터 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오랫동안 점프를 하고 연습을 하니 통증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라며 휴식이 필요함을 전했다. 그나마 강도를 조절하면서 회복이 빨라졌다. 김연아의 말마따나 70% 수준의 몸상태다.
나 원장은 "재활은 끝났다. 뼈가 손상된 것이 아니다. 깁스를 하거나 수술을 받을 수준도 아니었다. 연습량을 서서히 늘리면 과거 기량을 거의 회복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김연아는 다시 한 번 한국 피겨 부흥의 선봉에 나선다. 모든 유망주들은 '연아 언니'만을 바라보고 있다. BBC 등 해외 유수 언론은 김연아가 소치의 스타가 될 것이라며 밝은 전망을 내놓고 있다. 계속해서 탄생하는 '포스트 김연아'들을 위해 김연아는 또 다시 부담을 숨기고 올림픽 무대에서 외로운 연기를 해야 한다. 다시 한 번 한국 피겨의 구세주로 나서는 것이다.
이번에는 김연아로 인해 후배들에게 실질적인 면에서 좋은 환경이 조성될 수 있을까. 그 답은 누구나 알고 있듯 관련 기관이나 단체의 어른들의 몫이다. 김연아 홀로 한국 피겨를 지탱할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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