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김동현 기자] 어느 분야에서나 일본과 경쟁하면 '라이벌'이 된다. 스포츠라면 더 그렇다. 특히 '내셔널리즘'이 가장 강하게 충돌하는 축구대표팀 경기라면 더 그렇다. 그 유명한 "왜놈(일본)'한테 지면 '현해탄(대한해협)'에 투신하라"는 말도 축구에서 비롯됐다. 그만큼 축구 한일전은 모두의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 의미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한국은 일본을 여전히 넘어야 하는 라이벌로 여기고 있지만, 아시아 축구를 벗어나 세계 무대와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탈아(脫亞)를 지향하는 일본 입장에서는 이란, 호주,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함께 경쟁자 중 하나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정말 그럴까, '조이뉴스24'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국내 언론매체 최초로 지난 9월 27일 일본 도쿄의 일본축구협회(JFA 하우스)에서 다시마 고조 회장을 만났다. 한국 축구에 대한 인상부터 세계를 향하려는 일본 축구의 정책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가감 없이 들어봤다.
일본 축구는 지난 6월 열린 2018 국제축구연맹(FIFA) 러시아 월드컵에서 콜롬비아·세네갈·벨기에 등 세계 축구계에서 내로라하는 명문팀들과 대결서 밀리지 않는 저력을 보여줬다. 거함 벨기에를 후반 중반까지 2-0으로 거세게 몰아쳤다. 후반, 높이를 활용한 공격으로 밀고들어오던 벨기에를 제어하지 못해 2-3 역전패를 당했지만 세계 축구계에 남긴 인상은 대단히 컸다.
이 월드컵이 불과 두 달도 남지 않았던 지난 4월, 일본은 감독 교체라는 초강수를 던진 참이었다. 팀을 지도하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출신의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을 경질하고 JFA 기술위원장을 맡고 있던 니시노 아키라 감독을 선임했다. 놀라운 선택이었다. 일본 언론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늦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감독직에서 물러난지 너무 오래된 사람"이라는 우려를 표한 언론도 있었다. 어쨌든 2달 전의 감독 해임극은 옆나라인 한국에도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물론 해임의 명분은 있었다. 할릴호지치 감독과 함께 한 일본의 성적은 너무나도 좋지 않았다. 동아시아축구연맹(EAFF) E-1컵에서는 한국에게 1-4로 대패했고 3월 우크라이나 원정에서는 나카지마 쇼야(포르티모넨세) 등 새얼굴을 대거 발탁하며 전술적인 실험을 하다가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 가가와 신지(보루시아 도르트문트) 혼다 게이스케(멜버른 빅토리) 등 베테랑 선수들을 제외하면서 잡음까지 일으켰다. 일본 선수들이 주로 펼쳐온 패스 축구가 아닌, 투쟁적인 축구를 뿌리내리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결국 이 복합적인 이유로 사임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촌극이 일본 축구를 살렸다. 니시노 감독의 지휘 아래 일본 선수들은 똘똘 뭉쳤다. 특히 할릴호지치가 남겨놓은 유산인 투쟁적인 축구에, 일본 특유의 정밀한 패스를 결합한 축구로 큰 재미를 봤다. 나가토모 유토(갈라타사라이)와 사카이 히로키(올랭피크 마르세유)가 활발히 측면에서 움직이고 시바사키 가쿠(헤타페)가 패스 길목서 공을 분배했다. 이누이 다카시(레알 베티스) 오사코 유야(베르더 브레멘)는 공격 일선서 최고의 몫을 해냈다. 예상치 못했던 호성적에 일본 열도가 달아올랐다.
다시마 회장은 러시아 월드컵에서의 승리 요인을 '확고한 철학'으로 꼽았다. 그는 "한국은 파워나 피지컬, 골문으로 향한 빠른 전개로 승부를 보는 것이 꾸준한 철학이었다. 그게 한국의 역사다. 하지만 일본은 30년 전만 해도 그런 역사가 없었다"면서 "우리는 프랑스 월드컵에 처음으로 나가면서 패스를 확실히 연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철학으로 삼았다. 그게 역사가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이 다른 점이 있다. 다시마 회장은 "월드컵에서 16강에 든 적은 세 번(2002·2010 대회) 있었지만 이번 월드컵은 확실히 달랐다. 세계 강호들과 대등하게 싸우면서 우리의 철학을 관철한 대회였다. 즉 이런 축구를 꾸준히 해왔기에 가능한 것"이라면서 "선수비 후역습의 전술도 물론 선택할 수 있지만 그런 축구로는 세계 축구 중심의 변두리로 머물 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자신들의 색을 뚜렷히 만든 것이 효과를 봤다는 뜻이었다.
그의 열변은 계속 됐다. 다시마 회장은 '우리는 축구를 더욱 선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선진화라는 것은, 감독이 바뀌든, 포메이션이 바뀌든 상관없이 만들고 유지해야하는 철학을 가지는 것이다. 일본만의 축구를 하는 것, 그게 우리의 철학이라는 것을 모두가 이해해나가고 있다'면서 "사실 지금의 트렌드는 어떤 특정한 스타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두가 패스만큼은 확실하게 연결해나간다. 우리의 철학을 유지하면서 세계적인 수준에 맞춰나가고 싶다"고 강조했다.
축구는 일종의 생물이다. 태동한 이후 끊임없이 변화했고 또 진화해왔다. 다양한 스타일의 축구가 생겨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11명 전원을 수비적으로 둘 수도 있고 11명 전원을 공격적으로도 쓸 수도 있다. 변화무쌍한 축구를 구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골이 축구의 심장이라면, 패스는 심장까지 가는 혈액이다. 슈팅이 아무리 정확하다한들, 골이 들어갈 수 있는 지역으로 공이 배달되지 않으면 득점 확률은 적어진다. 이는 축구가 끊임없이 진화하는 과정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리이자 지속적인 트렌드다. 다시마 회장이 말한 철학의 유지 그리고 패스 정확도에 관한 이야기는 틀린 것은 아니다.
◆"'일본만의 길' 가겠다…철학 유지가 우리의 목표"
특히 '일본만의 길'을 유지한다는 것은 현재 JFA가 가지고 있는 최대 기조이기도 하다. 이 길을 유지하기 위해 JFA는 러시아 월드컵이 끝난 후 니시노 감독을 대신 해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을 선임했다. 성인대표팀 뿐만 아니라 23세 이하(U-23) 대표팀까지 통째로 맡기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도 '일본의 길'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다시마 회장은 "우리는 늘 '일본만의 길'을 주장해왔다. 지금 일본에 필요한 것은 일본을 확실히 이해하고 일본의 철학을 계속 주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서 "일본의 축구를 확실히 이해하는 인물에게 감독을 맡기고 싶다는 생각을 쭉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감독들을 비교했다. 그 안에서 기술위가 모리야스를 추천했고 나는 그걸 적극적으로 밀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모리야스는 실적도 있는 인물이고 JFA에서 일한 적도 있다. 같이 한 적도 있기 때문에 성격적인 부분도 잘 안다. 그렇기에 대표팀 전반을 맡기기에 적합안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칭찬했다. 모리야스에 대한 믿음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이게 곧 무조건 국내 감독을 선임해야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일본인이어야만 일본 감독이 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면 윤정환 감독처럼 세레소 오사카서 결과를 내고 있고 또 일본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훗날 일본 감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국인이든, 프랑스인이든, 독일인이든 전혀 상관없다"면서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일본의 감독이 될 수 있다. 전혀 이상하지 않지 않나. 홍명보도 한국인인지만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윤정환 세레소 오사카 감독과 홍명보 KFA 전무이사의 예를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하지만 역시 이번엔 모리야스가 최고라고 생각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유가 있는 발언이다. 일본은 2020 도쿄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있다. 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은 성적도 성적이지만 좋은 육성의 장 또한 된다. 다시마 회장은 "우리에게 도쿄 올림픽은 굉장히 운이 좋은 일이다. 올림픽은 연령 제한이 23세다. 어린 선수들이 메달을 딸 수 있도록 힘을 쏟다보면 선수들은 자연스레 길러지기 마련"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바로 이 선수들이 차기 월드컵으로 연결된다. 세대교체도 자연스럽게 가능한 상황이다. 그렇기에 운이 좋다고 하는 것이다. 이걸 활용하지 않으면 뭘 활용하겠느냐. 그런 면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성인대표팀과 하위 카테고리팀의 감독이 같은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생각에 이르렀던 것은 아니다. 일본도 U-23 대표팀과 월드컵 대표팀의 잦은 충돌로 선수 차출 등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다시마 회장은 "사실 예전엔 문제가 있었다.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좋은 활약을 펼치면 대표팀 감독들이 곧바로 그 선수를 불러 테스트를 하기도 했다. 선수들은 이미 지치고 과부하가 걸린 상태였다"면서 "같은 감독이라면 이런 부분에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과거에 했던 실패들을 거름 삼아 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50년 안에 월드컵 우승" 한국 축구에 주는 시사점
시행착오를 거쳐 만들어온 일본만의 축구는 월드컵에서도, 리그에서도 꾸준히 성과를 내고 있다. 이제 남은 목표는 월드컵 우승이다. 과거 JFA는 "50년 안에 월드컵서 우승하겠다"는 구체적인 안 또한 내놓았던 적이 있다. 다시마 회장도 "50년 안에 우승하려고 한다. 지금도 변하지 않은 목표다. 적어도 2030년까지는 4강에 들고 싶다"라고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 어려운 숫자임엔 틀림없다. 아시아 팀이 4강에 들어간 것은 2002 한일 월드컵 때의 한국 뿐이다. 일본은 16강이 여전히 최고 기록이다. 4강 도전은 결코 쉽지 않은 부분이다.
그러나 JFA의 진짜 목표는 결과가 아니다. 그 목표까지 가는 과정이 곧 일본 축구가 얻고 싶은 진짜 목적이다. 다시마 회장은 "이렇게 목표를 확고히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정체되어있을 수밖에 없다"면서 "우리의 선대들이 먼저 고안한 이 생각을 나는 회장의 포지션에서 잘 이어나가고 실행하고 싶다"고 미소지었다. 우승은 멀지언정 그 안에서의 과정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뜻이었다.
결국 이러한 일본 축구의 강력하고 확고한 철학은 눈부신 성장으로 연결됐다. 앞으로 이 철학을 유지하고 또 갈고 닦아나간다면 일본이 말한 50년 안의 월드컵 우승도 분명 꿈은 아니다. 무엇보다 옆나라인 한국에 시사하는 바도 절대로 적지 않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본인들의 축구 철학에 대한 확고한 태도는 한국도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한국 축구에 대해 "한국 축구의 구체적인 부분은 잘은 모르겠지만"이라는 전제를 달면서 "현재 한국은 변혁의 시기인 것 같다. 엘리트 축구에서 지금은 더 많은 아이들이 축구를 접할 수 있다고 차범근 선생께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이 '축구는 저변이 넓어야 존재 가치가 더 높아진다'고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시마 회장의 말처럼 한국도 단단한 철학을 가지고 축구의 가치를 재고하는 것이 변화의 시작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인들의 철학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일본 축구의 사례는 분명 훌륭한 교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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