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도요 카프는 꽤 독특한 형태의 구단이다. 대기업 마쓰다 자동차가 주식의 ⅓을 소유하고 있다. 마쓰다 자동차 오너 일가의 주식은 무려 90%가 넘는다. '기업 구단'으로 볼 수 있는 구조이지만 마쓰다 자동차는 야구단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마쓰다 일가는 그저 '시민 자격'으로 지분을 소유했을 뿐이다. 그래서 히로시마는 일본프로야구 다른 11개 구단과 달리 특정 모기업이 없는 시민구단으로 분류된다. 다만 마쓰다라는 든든한 '백' 덕분에 구단이 매각되거나 도산할 위험이 낮다는 게 '순수 시민구단'과 다른 점이다.
히로시마가 지난달 10일 무려 25년 만에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동안 일본 열도에는 이 팀의 상징색에 빗대 '붉은 열풍'이 불었다. 만년 하위권 팀, 연봉총액 바닥의 팀이 요미우리, 한신, 주니치 등 '큰 손'들을 제치고 리그 정상에 오르는 과정 자체가 감동이었기 때문이다. 요미우리를 상대로 한 이들의 우승 결정전 TV중계 시청률은 히로시마 지역에서만 평균 60%를 넘었다.
요미우리, 한신, 오릭스, 주니치 등 한국 선수들이 몸담았던 구단들과 달리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구단이 히로시마다. 자국내 FA 선수들도 잡지 못하는 마당에 몸값이 만만치 않은 한국의 스타들까지 넘볼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변방의 도시 히로시마, 가난하지만 근성으로 뭉친 선수단. 히로시마는 묘한 매력이 있는 구단이다. 히로시마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하는 3인의 인물을 소개한다.
◆20년 전 스승의 한 풀어준 오가타
25년 만에 리그 우승의 기쁨을 안겨준 오가타 고이치(緒方孝市) 감독은 무명 선수 출신 지도자다. 1987년 드래프트 3위로 히로미사에 입단한 뒤 8년간 큰 활약이 없었다. 다만 1995년부터 3년 연속 도루왕에 오르며 장타력을 갖춘 1번타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2009년 은퇴 후 6년간 1군과 2군을 오가며 지도자 경험을 쌓았다. 지난해 팀의 수장에 오른 그는 부임 2년 만에 히로시마의 새로운 영웅으로 등극했다.
'자신을 살리는 법-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필요한 인재가 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좌우명이다. 마치 무명선수였던 자신과 가난한 소규모 지방구단 히로시마를 상징하는 듯하다. 지난 1994∼98년 히로시마 감독을 역임한 미무라 도시유키 전임 감독의 조언이다. 미무라는 96년 11.5경기차로 1위를 달리다가 요미우리에게 역전 우승을 내준 비운의 감독이다. 오가타는 정확히 20년 만에 스승의 한을 깨끗이 씻어준 셈이다.
◆'육성의 히로시마' 전통 세운 고바
히로시마 구단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고바 다케시(古葉竹識) 감독이다. 1936년 구마모토에서 태어났다. 약체 팀인 히로시마를 구단사상 첫 리그 우승으로 이끄는 등 70년대 히로시마 황금기를 구축했다. 무명 선수를 유명선수로 조련하는 능력이 뛰어났고, 강팀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크게 공헌했다. 역대 히로시마 감독들 중 일본 팬들이 꼽는 가장 인상적인 지도자다.
우리 프로야구 초창기인 80년대 초에는 OB 베어스를 지도하는 등 국내 원로 야구인들과도 잘 아는 사이다. 오늘날 '육성의 히로시마'라는 전통을 확립한 상징적인 인물이다. 지금은 소년연식야구국제교류협회 이사장을 맡아 유소년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대졸 536홈런' 야마모토
65년의 히로시마 구단 역사를 대표하는 선수는 여럿이지만 하나만 꼽으라면 역시 야마모토 고지(山本浩二)다. 호세이 대학 시절인 1968년 전일본대학야구선수권 우승의 주역이자 그해 드래프트 1위로 고향 팀 히로시마에 입단한 프랜차이즈 스타다. 1975년부터 부동의 4번 타자로 오랫동안 활약했다. 통산 536홈런을 쳤는데, 일본 야구에서 고졸이 아닌 대졸로서 이런 성적을 올린 선수는 그가 유일하다. 호타에 준족이어서 1985년에는 통산 500 홈런과 200도루를 달성하기도 했다.
일본야구 사상 장훈과 기누가사 사치오, 그리고 야마모토 3명만 달성한 대기록이다. 장훈은 히로시마에서 태어났고, 기누가사와 야마모토는 히로시마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은퇴 후 1989년부터 히로시마 감독으로 취임했으나 91년 리그 우승 이외에는 뚜렸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일본 대표팀 수비·주루코치를 맡은 그와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야구보다 일기 예보에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다. 태풍의 발생과 영향 그리고 장마전선의 이동 등 날씨에 관한한 전문가 수준을 뛰어넘는 '오타쿠'다. 2008년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신조어 '카프 여자'
히로시마는 독특하고 개성있는 마케팅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카프 여자'라고 불리는 여성 대상 마케팅이 큰 화제를 뿌렸다. 지난 2011년부터 도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서 히로시마 팬이 갑자기 증가했다. '이유 없이' 멀리 떨어진 지방구단을 응원하는 팬이 늘어나자 사회 현상으로까지 여겨졌다. 2013년 NHK 9시 뉴스에선 이 신기한 일에 대해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생긴 신조어가 '카프 여자'인데, 2014년 일본의 '신어·유행어 톱 10'에 들기도 했다.
히로시마 구단의 하마다(浜田)영업 본부장에게 이유를 물어봤다. 해답은 역시 구단의 기획과 마케팅 능력에 있었다. "수도권의 여성 팬을 위해 '신칸센을 타고 히로시마로 GO!'라는 이벤트를 벌였다. 즉 간토지역 여성팬 대상 야구관전 투어를 기획하고 철도 및 화장품 회사 등의 협찬을 받아 왕복 철도 요금 총액 약 500만 엔을 구단이 부담하는 대형 이벤트였다. 반응이 폭발적이었는데, 모인 여성 팬의 수가 목표 모집인원의 15배에 달했다. 대성공이었다."
경기를 즐기면서 히로시마 구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식·음료를 제공했다. 여기에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는 조치까지 수반되자 수도권 여성팬들이 크게 호응했다. 선수들의 지원도 적극적이었다. 올해부터 LA 다저스에서 뛰는 에이스 마에다 겐타는 "일부러 신칸센까지 타고 온 팬들의 응원으로 승리 투수가 됐다"면서 기념촬영까지 해주는 등 여성팬들을 크게 매료시켰다. 참고로 히로시마는 일본 12개 구단 중 유일하게 여성 치어리더가 없는 구단이다.
◆주택가에서 환영받는 ML식 구장
마지막으로 히로시마의 명물 마쓰다 줌줌 스타디움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2007년 공사를 시작한 뒤 2009년 완공됐다. 구단은 1957년부터 히로시마 평화공원(원폭 피해지) 근처의 히로시마 시민구장(시 소유)을 오랫동안 홈구장으로 사용했으나 시설 노후화로 시와 구단이 협의 끝에 최신식 구장을 건설했다.
지방정부의 예산부족 분을 히로시마 구단이 메워줬다. 개장 후 10년간 사용료를 미리 완납하는 형식으로 건설비용을 마련했다. JR화물적치장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일본 최초로 메이저리그 야구장 형식으로 설계했다. 최대 수용관중 3만3천명에 히로시마역에서 도보로 15분 거리다. 이 구장은 우리의 광주 기아 챔피언스필드와 여러모로 닮은 꼴인데, 광주시 관계자들이 이곳을 방문해 새 구장 건설에 여러모로 참조한 적이 있다. 당시 이들을 인솔한 필자는 구장 주위가 주택가인 것을 알고 새삼 놀란 적이 있다.
보통 시끄러운 야구장이 들어서면 주민들이 반대하기 마련이지만 히로시마 시민들은 오히려 동네에 카프의 홈구장이 들어선다는 것에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시민구단 히로시마의 저력, 큰 돈을 쓰지 않으면서도 이들이 강호로 올라서게 된 하나의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현실에선 꽤나 부러운 환경이었다.
조희준은 20년 이상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야구행정을 다루며 프로야구의 성장과정을 직접 지켜봤다. 국제관계 전문가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출범 당시 한국 측 협상단 대표로 산파 역할을 맡았다.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문학부 출신으로 일본 야구에 조예가 깊은 그는 ▲KBO 운영부장 및 국제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프로스포츠협회 전문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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