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배우 차승원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많다. 전방위적 활약을 이어가고 있는 원조 '모델 출신 배우'이자, 코믹부터 로맨스, 스릴러, 사극까지 모든 장르를 소화 가능한 전천후 연기자이기도 하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의 '차줌마'라는 별명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가장 고민 없이 내놓을 수 있는 답은, 그가 흔치 않게 근사한 외모를 자랑하는 중년 배우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꽤 자주, 차승원은 타고난 비주얼을 활용하기보단 과감해보이는 연기 도전을 감행했다. 전작인 영화 '하이힐'에서 트렌스젠더로 변신했던 그는 새 영화 '고산자'에선 진득히 때가 묻은 옷을 걸치고 전국을 누비는 지도꾼으로 관객을 만난다.
31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이하 '고산자', 감독 강우석, 제작 ㈜시네마서비스)의 개봉을 앞둔 배우 차승원의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고산자'는 시대와 권력에 맞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동여지도를 탄생시킨 지도꾼 김정호의 감춰진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차승원이 김정호 역을 연기했다.
이날 인터뷰에서 차승원은 드라마 '화정'에 이어 또 한 번 영화로 사극 연기를 선보이게 된 소감을 알리며 "다음에 어떤 영화를 할 지 모르지만 사극은 이제 그만 하고 새로운 것들을 해보고 싶다. SF나 이상한 느와르 영화라면 좋겠다"고 장난스런 답을 내놨다.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빼어난 외모를 살릴 수 있는 작품보다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는 영화를 택한 배경에 대해서도 밝혔다.
"배우는 뭔가 이해가 돼야 연기를 하잖아요. 제가 그 쪽(성소수자)은 아니지만, '하이힐'의 그 남자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됐어요. 고산자 김정호의 삶도 이해가 돼서 연기했죠. SF물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은 소위 이야기해 '일차원적으로 내 것을 차용해 연기하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늘 했기 때문이에요. 별로인 것 같아요. 어떤 벽 같은 생각인데, 그런 무기까지 쓰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있죠."
캐릭터의 감정을 가슴으로 이해해야만 배역을 그려낼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고착화된 연기를 경계하기 위한 고집이기도 하다. 차승원은 "감성이 이해가 돼야만 연기를 하는데 확신이 있는 것 같다"며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고착화 된다고 해야 할까, 네비게이션을 따라 출발지부터 목적지까지 정해진 길을 가는 느낌"이라고 얘기했다.
"그게 어떻게 보면 괜찮을 수 있는 반면, 뭔가 의외의 것들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가두는 느낌이거든요. 나이가 더 들면 생각이 바뀔 수 있겠지만, 현재 제가 생각하기에 그런 연기를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좀 못해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현장에 갔을 때 의외의 것이 나오는 순간의 희열이 있거든요. '어떤 수치까지 도달해야 해'라고 생각한 뒤 현장에 가면 그 맛이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많이 '놔야' 할 것 같아요. 계산도 필요하지만, 너무 완벽하게 계산해서 도표 만들 듯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최고의 사랑' 때까지만 해도 그런 연기를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었어요. 남이 뭘 하든 신경쓰지 않고, 나만 하면 되는 연기요. 그런 캐릭터 연기도 필요하겠지만 이제 나를 놓고, 어우러지고, 내가 좀 덜 먹더라도 남에게 주고, 나도 받고, 그러다 감정이 동요됐을 때 폭발하는 것들이 두 시간 짜리 영화를 볼 때 더 흡입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모델로 활동했던 이력이 말해주듯, 차승원은 연기 외적 조건, 예컨대 큰 키와 잘 생긴 외모로 늘 주목받는 배우였다. 서구적 외모를 지닌 그가 '화정'에 이어 '고산자'까지 연이어 사극 작품에 캐스팅된 것에 대해 차승원은 "부담감은 있었다"며 "하지만 자꾸 의식하면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워지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이번 작품에서 좋았던 건, 정확하게 뭔가를 연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간 적이 없었다는 점이에요. 정확히 뭘 연기하겠다고 생각하고 간 적이 별로 없었어요. 현장에 도착하면 여러가지 조건들이 있는데, 거기 저를 맡긴 느낌이었죠. 처음엔 '왜 이렇게 날 사극에 캐스팅하려 했지?'하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하지만 찍다 보니 '나는 이 감성을 이해 못하겠어' 하는 부분은 없더라고요. 영화에서 김정호라는 사람이 단순히 무거운 사람은 아니고, 약간 헐렁하거든요.(웃음) 그래서 저에게 시나리오를 주지 않았나 싶었어요."
지난 1988년 모델로 데뷔한 이력을 포함하면, 차승원은 내년이면 연예계에 데뷔한 지 30년차를 맞는 배우가 된다. "30년차라고요?"라며 스스로도 놀란 듯 반문한 그는 '오래 연기해온 배우로서 앞으론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가'를 묻는 질문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질문으로 생각하고 답하겠다"고 말했다. 연륜과 책임감이 느껴지는 그의 대답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누군가에게 한 이야기인데, 예전엔 남을 좋아한다는 것이 남에게 호의를 베풀고 정신적,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조금씩 지나니 남을 좋아한다는 건 결국 남이 싫어하는 행동을 안하는 것이더라고요. 그것만 되더라도 그 사람을 굉장히 좋아하는 거예요. 나와 다른 사람을 조금씩 인정해주고, 그가 뭐라고 하든 그의 세계를 바라봐주고, 내가 그것을 변질시키거나 내 생각을 주입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들이 드는 거죠. 앞으로 배우 생활을 함에 있어 제가 무수한 배우들을 만날텐데, 후배들에겐 그런 선배가 되고 싶어요. 그가 싫어하는 어떤 것을 하지 않는 배우요. 그것이 후배들을 더 좋은 배우로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 아닌가 해요. 내가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내가 잘 하고 있으면, 저 사람이 저런 길을 가는데 그것이 좋게 보인다면 말이에요. 그렇다면 그 후배보다 앞서 길을 간 30년차의 어떤 사람으로서, 그 후배가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게 이 시점에서 제가 되고 싶은 인간형이고요."
한편 '고산자'는 오는 9월7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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