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배우 박병은은 영화 '암살'의 카와구치 역에 낙점되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무려 세 단계의 오디션 끝에 최동훈 감독으로부터 "같이 합시다, 병은 씨"라는 말을 듣던 그 순간, 그는 '메소드 연기'를 펼쳤다고 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터질 것 같았지만,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크고 작은 영화를, 드라마를 누비며 연기에 잔뼈가 굵은 그지만 이렇게 한 단계 한 단계 가슴 졸이며 대작에 합류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영화 '연애의 온도' 당시 인터뷰 자리에서 만났던 박병은을 '암살'(감독 최동훈, 제작 케이퍼필름)이 누적 관객수 1천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을 시점 다시 마주했다. 그간 박병은은 긴 휴식 없이 꾸준히 연기 활동을 이어왔다. 우정 출연한 이원석 감독의 영화 '상의원'의 선왕으로, 김기덕 감독이 제작한 '붉은 가족'(감독 이주형)에선 남한 가족의 아빠로 등장하기도 했다. '몬스터'(감독 황인호)의 후반부를 강렬하게 장식한 사채업자도, 영화 '악인은 살아있다'의 주인공 한병도도 그였다. TV 단막극이나 미니시리즈에도 얼굴을 비췄다.
다양한 작품에서 관객을, 시청자를 만났던 박병은에게 '암살'은 첫 번째 천만 영화다. 그는 영화의 흥행에 대해 "너무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며 "많은 배우들이 있지만, 작은 역이든 큰 역이든 천만 관객이 든 영화에 참여한 배우가 몇 명이나 되겠나. 정말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암살'은 1933년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친일파 암살작전을 둘러싼 독립군들과 임시정부대원, 그들을 쫓는 청부살인업자까지 이들의 엇갈린 선택과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을 그린 이야기다. 영화에서 박병은은 일본군 장교 카와구치 역으로 분했다. 흰 피부, 어딘지 멍한 눈을 한 냉혈한 카와구치는 박병은을 만나 그만의 캐릭터로 완성됐다.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몰랐어요. 하지만 시나리오 속 이 배역이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주변 친구들도 욕심을 많이 냈던 캐릭터죠. 최동훈 감독님을 두 번째 뵐 때 일주일 간 대사를 모두 외워 갔어요. 그 땐 일본어 선생님이 없었을 때니 일본어를 하는 한국인 친구를 만나 녹음을 부탁해 항상 들었죠. 핸드크림을 바르는 설정처럼 디테일한 것도 준비했고요. 군인과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강박적인 행동을 생각해보니 핸드크림을 바르는 것이 좋겠더라고요. 1930년대 화장품 역사도 공부하고, 집에서 핸드크림을 준비해가기도 했죠."
카와구치 역을 맡겨 준 최동훈 감독은 박병은에게 "배우로 사는 동안 감사드려야 할 사람"이다. "누군가 저를 원해서 시나리오를 준 것이 아니고 제가 1,2,3차 오디션을 거쳐 캐스팅된 작품 아닌가. 5개월 간 열심히 촬영을 했는데 결과가 좋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것이 박병은의 이야기다.
순제작비 180억 원이 투입된 대작 '암살'은 최근 충무로 상업 영화들과 비교해 촬영 기간도 길었다.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이어진 촬영에서, 박병은에게 큰 힘이 됐던 사람은 대학 선후배로 인연을 맺은 하정우(하와이 피스톨 역),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호흡했던 오달수(영감 역)였다. 공교롭게도 극 중 카와구치가 가장 많이 만나는 인물들을 연기한 두 배우가 박병은과 친분이 있었다.
"첫 촬영을 중국에서 했는데, 상해 인근의 숙소에 모든 배우들이 있었어요. 촬영이 끝나고 오달수 형, 이경영 형, 하정우와 양꼬치집에서 맥주를 한 잔 하며 영화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 정말 재밌었어요. 저보다 더 대단한 경력을 지닌 배우들과 매일 밤 연기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됐죠. 정우에게는 촬영을 쉬는 중 함께 믹스 커피를 마시며 순간 순간 드는 고민을 털어놨어요. 정우는 '형, 우리 아직도 학교 다니는 것 같아요. 학교에서 영화 찍는 기분이에요'라고 말하기도 했죠.(웃음)"
'암살'의 흥행으로 박병은을 알아보는 이들도 확연히 많아졌다. "15년 정도 영화를 찍었는데, 관객들의 이런 사랑을 받으니 놀랍더라"고 웃으며 말하는 그다. 박병은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관객도 있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 세 손가락을 펴 보이며 "맞죠?"라며 반갑게 묻곤 한다. 극 중 카와구치가 300명의 조선인을 죽였다는 의미에서 세 손가락을 펴 보이는 장면을 따라 인사를 건네는 식이다.
"인터뷰를 하러 일산에서 버스를 타고 왔는데, 맨 뒷자리 옆에 있던 두 여자분께서 '혹시 300명 아니세요? 300명 죽이신 분?'이라고 물으시더라고요. 함께 셀카를 찍자고 하셔서 사진도 찍었네요.(웃음)"
'암살'의 눈부신 흥행 이후, 박병은을 향한 영화계의 러브콜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만큼 많아지고 있다. 물론 그에 앞서 촬영해 둔 새 영화들로도 관객을 만난다. 하기호 감독의 '극적인 하룻밤'과 이윤기 감독의 '남과 여'가 개봉을 앞뒀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암살'의 카와구치, 혹은 '300명'이 아닌 박병은이란 이름을 또렷이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농익은 배우 박병은의 존재감을 발견한 것, 천만 영화 '암살'이 세운 또 하나의 위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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