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영화 '극비수사'는 배우 김윤석이 또 한 번 관객의 기대를 배반할 작품이다. 기분 나쁘게 뒤통수를 맞는 듯한 배신감은 결코 아니다. 강하고, 날카롭고, 때로 섬뜩함을 안겼던 대표작들을 모두 잊게 할만한 그의 얼굴이 '극비수사'엔 녹아 있다. 애잔한 사랑의 기억을 그린 '쎄시봉'이나 따뜻한 스승으로 분했던 '완득이'에서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평범해만 보이지만 소신만은 또렷한 형사, 무심한듯해도 가만 보면 포근한 가장의 표정이 한껏 힘을 뺀 김윤석의 연기를 만나 관객의 가슴을 두드린다.
'극비수사'는 사주로 유괴된 아이를 찾는 형사와 도사의 33일 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1978년 부산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김윤석이 형사 공길용 역을, 유해진이 무속인 김중산 역을 맡았다.
'극비수사'의 시나리오를 받고는 단번에 출연을 수락했다는 김윤석은 수사물의 외양을 띤 이 영화가 공길용과 김중산이라는 두 가장의 삶을 비춘다는 점에서 크나큰 매력을 느꼈다고 말한다. 두 주인공 길용과 중산이 아이를 찾기 위해 때로 뭉치고 때로 부딪히는 동안, 중산의 집에서 노닐던 병아리는 어느덧 닭으로 자라난다. 과학과 미신이라는 대척점에 있는 두 남자 역시 의외의 소통을 이루며 성장한다.
김윤석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타협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화합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이야기"라며 "길용의 입장에서 중산은 영화 속 대사처럼 아주머니들의 돈을 빼 먹고 듣기 좋은 소리나 하는 사람 같았지만, 그 나름의 치열한 노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길용은 중산이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깊이 파고들어보려 하지 않아요. 싫고, 나쁘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알고 보면 중산 역시 나름의 소신이 있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영화의 바탕이 된 실화는 영화를 연출한 곽경택 감독과 배우 김윤석에겐 어릴 적 숱하게 들어 익숙한 이야기였다. 세상이 떠들썩했던 이 사건을, 김윤석은 '극비수사'의 시나리오를 보며 별다른 설명 없이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곽경택 감독님과는 어린 시절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동네에 살았더라"며 "연배가 비슷하기도 하고 어쩌면 빨리 만날 수 있는 사이였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감독님이 주로 선보였던 조직폭력배의 세계나 남성성 강한 우정 이야기를 내가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마 곽경택 감독님이 계속 그런 영화를 추구했다면 우리가 만날 기회가 없었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극비수사'는 그런 하드보일드한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이제 저는 하드보일드한 액션을 하기엔 나이가 차서 다른 배우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거든요. (웃음) '극비수사'는 수사물인데도 절제된, 군더더기 없이 내용에 충실한 면이 마음에 들었어요. 감독님의 내공이 달라지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또 다른 진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의 말마따나, '극비수사'는 수사물의 외피를 둘렀지만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 유행처럼 재현됐던 스릴러 수사물과는 거리가 멀다. 소재는 유괴 사건이지만 사람들이 예상할법한 자극적인 서사와는 전혀 다른 색깔로 서스펜스를 그려낸다.
"살짝 들은 이야기인데,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투자사에서도 썩 반기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수백 건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심사를 할 테고, 투자자들은 강렬하거나 튀는 것을 선호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이건 잔잔하거든요. 안에선 모든 것이 끓고 있지만요. (투자 심사에서) 썩 높은 순위에 있지는 못했다고 들었는데 제가 출연을 결정하면서 투자도 진행됐어요. 저는 '극비수사'의 시나리오를 보면서 그 안에 있는 진실된 어떤 것, 차곡차곡 쌓인 탄탄한 디테일이 보였어요. 가식이 아니더라고요."
지금의 김윤석은 충무로 영화 제작자들이라면 두 손을 들고 반길 톱배우다. '추격자' '황해' '화이' '해무' 등에서 펼쳤던 강렬한 연기는 이미 그의 특기로 각인됐다. '거북이 달린다' '완득이' '쎄시봉'에선 때때로 기대 못한 얼굴을 보여주며 그의 변신을 향한 관객들의 갈증을 달래줬다. 그런 그가 '극비수사'를 선택한 데에는 많은 이들이 몰랐던, 배우로서 그의 소신이 작용했다.
"배우들의 작품 선택 기준은 모두 다를 거예요. 저는 캐릭터보다는 시나리오를 더 중요시해요.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가 중요하죠. 설령 '이 캐릭터를 연기했을 때 상업적으로 내게 별 도움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도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 있어요.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선택하지 않으면 투자를 받지 못하고 만들어지지 못하는 영화들이 있거든요. 제가 출연해서 소중한 이야기를 놓치지 않는데 일조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그것이 차곡차곡 쌓여서, 상업적으로 성공하든 아니든 먼 훗날 제 필모그라피를 봤을 때 '부끄러운 작품이 없다' '다 나름대로 의미있는 작품이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제 목표예요."
김윤석의 연기에 신뢰감을 느끼는 이들은 비단 충무로의 영화 투자자나 한국의 관객들만이 아니다. 일본을 비롯한 해외의 팬들 역시 팬레터를 통해 김윤석의 연기를 향한 지지의 메시지를 보내온다.
"몇 달 전, 생일을 맞아 팬레터를 보내 온 팬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일본을 비롯해 외국 팬들로부터 편지가 온 거예요. 그 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가장 인상깊게 본 제 영화가 '화이'라고 하더라고요. ''화이'에서의 당신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는 편지였어요. 일본 사람이, 한글을 배워 한글로 편지를 썼더라고요. 또 누군가는 '황해'에서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하고요. 관객들이 보는 시각이 다양하다는 생각도 들고, '어떻게 '화이'를 봤지?'라는 생각에 깜짝 놀라기도 했죠.(웃음)"
한편 김윤석과 유해진, 장영남과 이정은 등이 출연한 '극비수사'는 오는 18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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