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필기자] 2014 브라질월드컵 실패의 충격으로 한국 축구는 다시 한 번 세계와의 격차를 절감하며 뼈를 깎는 쇄신의 물결에 휩싸였다. 외국인 감독이 대표팀을 지휘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세를 이루면서 이용수(55)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유럽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2002 한일월드컵 당시 4강 신화를 이끈 거스 히딩크(현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 감독 영입에 성공했던 이 위원장이기에 기대감은 컸다.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준우승으로 이끈 베르트 판 마르바이크(62) 감독이 우선적으로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판 마르바이크 감독과 계약 조건을 놓고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협상은 결렬됐다. 세금 문제와 국내 활동 기간 등에서 이견을 보이며 판 마르바이크 감독의 한국행은 불발됐다. 유소년부터 A대표팀까지 국내 축구 전체를 들여다봐야 하는 감독이 필요했지만 판 마르바이크는 이런 요건에 부합하지 못했다.
인내심을 갖고 다시 새 감독 영입에 나선 이 위원장은 1970~1980년대 레알 마드리드(스페인)에서 활약했던 독일 출신의 울리 슈틸리케(60) 감독을 선임하는데 성공했다. 한국에는 생소한 인물인데다가 스위스, 코트디부아르 대표팀을 맡았을 때 그리 인상적인 업적을 남기지 못해 물음표가 붙었다.
하지만, 독일 축구대표팀 수석코치에 유소년대표팀 감독까지 지내며 전 연령대를 폭넓게 바라보는 시야, 그리고 합리적인 성격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2018 러시아 월드컵까지 한국대표팀 지휘봉을 맡기며 확실한 믿음을 부여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취임 후 두루두루 살피며 한국 축구 이해에 돌입했다. 유소년 리그부터 대학 리그 왕중왕전 결승, K리그 클래식, 챌린지(2부리그) 경기를 가리지 않고 다니며 A대표팀 뼈대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지난 10월 파라과이와의 평가전을 통해 한국대표팀 사령탑 데뷔전을 치른 슈틸리케 감독은 4차례 평가전을 통해 2승2패, 4득점 4실점의 기록을 냈다. 파라과이와 요르단에 승리하고 코스타리카와 이란에 패했다. 홈 2연전 1승1패, 원정 2연전 1승1패로 균형잡힌 성적을 냈다.
무엇보다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층을 넓히며 다양한 인재 발굴에 나섰다. 시간이나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기존 대표팀에서 제외됐던 이들을 중점적으으로 기용하며 가능성 찾기에 집중했고 김진현(27, 세레소 오사카), 남태희(23, 레퀴야), 조영철(25, 카타르SC), 한교원(24, 전북 현대) 등을 발굴하는데 성공했다.
전술적 측면에서는 4-2-3-1에 기반을 두면서도 공격진이 자유롭게 위치 이동을 하는 등 짧은 패스를 앞세운 축구를 구사했다. 대표팀의 틀이 완벽하게 잡히지 않았지만 볼 점유율을 높이는 축구로 한국 축구의 정상화 가능성을 보여줬다. 슈틸리케 감독은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입장 시 벤치에 있지 않고 도열해 손뼉을 마주치는 등 따뜻한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슈틸리케의 눈은 특정한 틀에 고정되지 않았다. 호주 아시안컵 대표팀 최종 명단 발표를 앞두고 제주도에서 가진 전지훈련에서 선수들의 열정과 배고픔을 유도하며 '깜짝 발탁' 가능성을 열어뒀다. 열심히 하면 누구든지 국가대표에 들어올 수 있다며 '될 수 있다'는 희망도 던졌다. 자체평가전에서는 직접 찾아낸 대학생 선수들을 뛰게 해 경쟁의 폭을 넓혔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강수일(27, 포항 스틸러스), 이종호(22, 전남 드래곤즈), 이정협(23, 상주 상무), 권창훈(20, 수원 삼성) 등이 새롭게 두각을 나타냈다. 최종 엔트리에서는 신예 이정협이 박주영(29, 알 샤밥)을 밀어내고 발탁되는 놀라운 결과로 이어졌다. 타깃맨에 대한 갈급함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있었다고 해도 이정협의 발탁은 의외였으나 따지고 보면 충분히 슈틸리케 감독의 필요조건을 채웠다.
슈틸리케호는 해가 바뀌면 호주에서 아시안컵 정상 정복에 도전한다. 우승보다는 슈틸리케 축구의 진면목을 보여주는데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아시안컵을 우승한다는 보장이 없다"라며 낮은 자세로 판을 뒤집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손흥민(22, 레버쿠젠)의 말에서 달라지고 있는 한국대표팀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슈틸리케 감독 영입의 궁극적인 목적은 4년 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의 자존심 회복이다. 길게 보고 점진적 변화를 꿈꾸는 슈틸리케 감독의 구상이 한국축구에 접목돼 대표팀은 강호로 거듭날 수 있을까. 축구팬들은 그 과정을 즐기며 기다릴 준비가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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