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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 박경훈 감독, '잃어가는 초심'을 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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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지휘봉 내려놓아, "5년 동안 지쳐…조급해지더라"

[이성필기자] "내 스스로가 이상해졌어요."

K리그 최고의 패셔니스타 지도자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박경훈(52) 전 제주 유나이티드 감독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나이에 맞지 않게 백발임에도 불구하고 박 감독은 다양한 패션을 멋스럽게 소화한다.

강인하고 준수한 외모의 박 감독이다보니 제주가 전면에 내세운 마케팅 역시 박 감독 중심으로 이뤄졌다. 2006년 부천에서 제주로 연고 이전을 한 뒤 정착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던 제주의 전환점이 2009년말 박 감독의 부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박 감독은 K리그 지휘봉을 잡은 첫 해인 2010년 제주를 리그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2009년 알툴 베르날데스 감독의 지도 철학이 선수단과 이견이 생기면서 포항 스틸러스에 1-8로 대패하는 등 최악의 시즌을 보내며 14위로 마감했던 제주는 박 감독 부임으로 180도 달라졌다.

삼다도 축구, 방울뱀 축구, 오케스트라 축구 등 제주의 축구 스타일 강조하기 위한 작명 재치도 뛰어났다. 말로 표현한 팀 운영 철학을 실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박 감독은 팀 개선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고 제주는 중상위권 팀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그런데 박 감독은 3일 전격적으로 자진 사임했다. 제주와 박 감독이 올해 많은 눈에 띄는 성과를 낸 것을 감안하면 다소 의아한 사임이었다. 제10회 대한민국 스포츠산업대상 대통령상 표창을 수상했고, 일명 '의리 복장'으로 팬심을 모았으며, 관중 2만명 돌파 시 머리카락을 오렌지색으로 염색하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을 내세우는 등 자신을 팀 마케팅의 한복판으로 내놓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박 감독이다. 제주는 리그 5위에 그치며 목표로 했던 내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출전 티켓을 놓쳤지만 구단 수준을 업그레이드 시키며 관광의 섬 제주의 문화콘텐츠로 자리 잡는데 공헌했다는 점에서 더 그랬다.

장석수 제주 대표이사에게 사임 의사를 전달한 후 신변정리를 끝낸 박 감독은 서울 자택으로 올라왔다. 3일 오후 가족과 함께 수유동 4.19 묘역 인근 커피숍에서 차를 한 잔 하며 간만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 와중에 기자의 전화를 받은 그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너무 앞만 보고 온 것 같아요"라고 속마음을 표현했다.

박 감독은 얼마든지 제주 감독직을 더 수행할 수 있었다. 2010년 그가 사령탑으로 부임한 이후 감독 교체가 없었던 팀은 사실상 제주가 유일했다. 전북 현대도 최강희 감독이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맡느라 자리를 비워 감독대행 체제가 두 차례 이뤄졌으니 제주의 박 감독만 격동의 K리그에서 지속적으로 지휘봉을 휘둘렀던 것이다.

그는 "5년을 해오면서 내 스스로 많이 급해졌더라고요. 평정심을 잃어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몸도 많이 지쳤어요"라고 자진 사임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무엇보다 초심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이 박 감독 스스로의 판단이다. 제주 감독 부임 이전 박 감독은 2007년 17세 이하(U-17) 대표팀을 맡아 국내에서 열린 U-17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쓴맛을 본 뒤 지도자로서 실패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가 자존심을 되찾고 지도 스타일에 대한 평가를 바꿔놓은 것이 바로 제주였다. 본인과 구단 모두에게 윈-윈이 된 결합이었다.

그래도 승부의 세계에 몸담고 있는 이상 성적 스트레스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박 감독은 "스트레스를 달고 살았다.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게 나오더라. 신장 기능도 떨어지고 얼굴이 꺼매져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다. 한방 병원에서 진단을 받으니 몸에 화가 많다더라. 화병을 참고 산 것이다"라며 악화된 건강으로 더 이상 감독직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고 전했다.

골프나 음주 등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취미생활을 즐기지 않다 보니 늘 선수단과 씨름하다 숙소로 돌아오면 무료함과 허망함에 사로잡히곤 했다. 성적을 내야 된다는 압박감 속에 감독으로서 견뎌내야 할 일들도 많았다. 구단의 정책에 따라 구자철(마인츠05), 홍정호(아우크스부르크) 등 팀의 핵심 선수들의 해외 이적을 허용했고, 지난해 드래프트로 선발해 기대를 모았던 류승우(브라운슈바이크)도 레버쿠젠으로 임대 보냈다. 필요한 선수들을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고 나면 대체자를 찾아 전력을 유지하느라 마음이 급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처음에는 선수들의 긍정적인 면을 살피며 칭찬을 해줬는데 최근에는 단점만 찾느라 바빴다. 왜 그렇게 단점을 많이 찾아내고 있는지 모르겠더라. 내 스스로 조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변해가는 자신을 다잡지 않으면 안되는 시점이었다고 전했다.

제주에는 고교, 대학 축구팀이 적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은 프로 선수단 운용에 애로점이 있는 것이 당연했다. 다른 팀들은 비주전 선수들을 대학, 실업팀과 연습 경기를 갖게 해 기량을 확인하고 1군에 올릴 자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제주는 그런 여건이 못되니 선택지가 좁았다. 박 감독은 "못 뛰는 선수를 확인할 수 없다. 경기력을 이어주고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그런 것들이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가 된 것도 같다"라고 돌아봤다.

박 감독은 휴직 중인 전주대 체육학부 축구학과 교수로 돌아갈 예정이다. 물론 당장은 아니다. 한 학기 정도는 시간을 두고 학교로 복귀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그는 "2~3개월 정도는 푹 쉬고 나서 3~4개월 정도 유럽 등에 나가 축구 관람도 하고 새로운 것을 보려고 한다. 내후년이 정식 복귀고 내년 1학기에 가도 되지만 복잡한 머리를 정리해 보려고 한다"라며 이제 여유있게 미래를 설계하겠다며 웃었다.

조이뉴스24 이성필기자 elephant14@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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