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필기자] 브라질월드컵 16강전이 연일 명승부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조별예선에서 탈락한 한국은 대표팀이 이미 귀국한 가운데 이번 월드컵 실패를 계기로 새로운 축구를 보여줘야 한다는 시각과 유지·보수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한 모양입니다. 어느 쪽이든 좋은 방향으로 한국 축구를 바꿔가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기자도 근 한 달이 넘는 월드컵 출장을 끝내고 한국으로 향합니다. 한국대표팀의 부진으로 귀국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축구가 어떻게 세계와의 격차를 줄이고 더 좋은 팀으로 변해가야 하는지 이런저런 생각도 들구요.
한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기자는 재미난 경험을 했습니다. 숙소 근처에 상파울루를 연고로 하는 팔메이라스와 코린치안스, 산토스 등의 팬 샵이 있어서 찾아갔습니다. 축구가 문화의 일부인 브라질에서 번화가마다 프로 클럽들의 매장이 있는 것이야 뭐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습니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산토스 팬 샵에서 기념품을 구매했습니다. 점원이 물어봅니다. "상파울루에 왔으면 확실히 정하고 가야 하는 것이 있다. 당신은 산토스를 좋아하나, 아니면 코린치안스, 상파울루FC, 팔메이라스인가?"라고 말이죠.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다가 산토스라고 답하니 웃으면서 가격을 10헤알 정도 깎아주겠답니다. 뭐 고맙기는 했는데 브라질 사람들의 축구 사랑이 참 대단하다 싶었습니다.
산토스의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을 들고 은행으로 향했습니다. 출장 마지막날이다보니 주머니에 헤알이 한 푼도 없는 겁니다. 택시를 타야 하기에 환전을 하러 갔습니다. 안전이 늘 걱정되는 곳이기에 무장 경찰 서너 명이 은행을 앞뒤고 지키고 있습니다. 기자도 괜한 걱정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는데, 상파울루 사람들은 일상이니까 제 할 일들을 하고 갑니다. 외신 보도를 통해 워낙 이곳의 치안이 불안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사람 사는 곳에 날마다 사건 사고만 있겠나 싶었습니다.
환전을 담당하던 은행원 알렉산드레이 헤이나르 씨가 갑자기 용무 외의 말을 겁니다. 브라질에 왜 왔냐는 일상적인 이야기죠. 그래서 월드컵 때문에 왔다고 했더니 "한국이 벨기에와 하는 경기를 봤다. 왜 그런 점수가 나왔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경기 내용이 생각나서 어색하게 웃었더니 기자 앞으로 헤알 대신 내미는 것이 있었습니다. 코린치안스 회원 카드였습니다. 한국-벨기에전이 열렸던 곳이 아레나 데 코린치안스였습니다. 월드컵을 앞두고 경기가 열리는 구장의 홈 구단 팬들에게 우선적으로 입장권 구매 기회를 줬는데 한국-벨기에전을 직접 가서 봤고 2일 예정된 아르헨티나-스위스의 16강전도 회원 카드로 티켓을 사 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자도 웃으면서 아무런 생각없이 산토스 엠블럼이 박힌 쇼핑백을 들어 보이며 브라질 국가대표 상품을 샀다고 흔들었더니 표정이 확 변합니다. "산토스는 싫다. 오직 코린치안스다"라는 겁니다. 코린치안스 팬 앞에서 산토스 샵 다녀온 티를 냈으니… 어색한 저의 웃음과 무표정으로 헤알을 계수하는 헤이나르 씨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흐릅니다.
그런데 헤이나르 씨가 말합니다. 한국 프로팀을 안다며 어색한 발음으로 "쑤언~", "뽀항~" 이러는 겁니다. 같이 있던 동료도 놀랐고요. 어떻게 수원과 포항을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나 클럽월드컵 등의 경기를 봤다는 겁니다. 브라질 최대 스포츠 전문 채널인 스포르트 TV가 다채널로 전 세계 주요 축구경기 중계를 하는데 이를 통해 수원과 포항 경기를 봤던 모양입니다.
환전하고 가는 기자에게 헤이나르 씨가 묻습니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K리그 팀은 어디냐"라고 말이죠. 한 구단을 대답해줬더니 씩 웃습니다. 헤이나르 씨가 왜 잘 알지도 못하는 K리그 팀에 대해 물어봤을까요. 아마 한국도 브라질처럼 국내 프로리그가 활성화돼 있다고 생각해 자기가 코린치안스 팬인 것처럼 한국인들도 누구나 좋아하는 클럽 하나쯤은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산토스는 네이마르를, 코린치안스는 알렉산드레 파투를 배출한 클럽입니다. 이들이 유럽에 진출하고 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는 데는 자국 리그에서의 성장이 배경이 됐다고 여기는 브라질인들의 자부심을 은연중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사례를 꺼낸 것은 'K리그가 살아야 대표팀이 산다'는, 매번 월드컵 이후면 지겹도록 나오는 명제 때문입니다. 팀은 많은데 팬은 적은 K리그입니다. 리그 활성화를 위해 각 구단 관계자들은 잠을 못자고 불철주야 연구하고 몸을 던지고 있습니다. 대표팀이 못하면 늘 K리그가 유탄을 맞아 억울함도 클 겁니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에서는 K리그 출신 김신욱, 김승규(이상 울산 현대), 이근호(상주 상무) 등이 시쳇말로 확 떴습니다. 그들은 K리그에서 뛰며 착실하게 월드컵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K리그가 중요하다는 거겠죠. 해외에서 뛰고 있는 대표급 선수들 대부분도 K리그를 통해 개인기량을 키워 해외 진출을 했습니다. 분명 K리그는 경쟁력이 있습니다.
물론 대표팀은 최근의 경향상 각국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과 K리그 소속 선수들이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은 험난한 주전 경쟁을 이겨내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고 공부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죠. K리그 선수들도 대표팀에 뽑히도록 더 좋은 기량을 연마해야 할 겁니다.
브라질에서 느낀 바로는 K리그 각 구단들이 팬을 '고객'이 아니라 '가족'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헤이나르 씨는 코린치안스의 가족 회원권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평생의 팬이 대물림으로 만들어지는 거죠. K리그는 팬을 '고객'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팬들을 가족으로 보고 함께 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요. 물론 당장 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겠습니까. 차근차근 바꿔가야겠죠. K리거가 대표팀의 희망이 됐다는 현재의 상황을 한국프로축구연맹은 더욱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할 것이고요.
어쨌든 브라질에서의 3주가 마무리됐습니다. 한 가지 얘기만 하고 이 시리즈를 마칠까 합니다. 한국대표팀은 탈락했지만 대한축구협회 임원이나 기술위원 등이 계속 남아서 브라질월드컵을 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벨기에전 관전을 하러 왔던 K리그 여러 구단 사장, 단장님들은 무엇을 느끼고 가셨는지도 궁금합니다. 몇몇 기술위원이 한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 경기를 관전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16강 이후 결승까지 현장에 남아서 세계 축구의 흐름을 확인하고 있는지는 확인이 안됩니다.
축구는 교류를 통해 발전하게 마련인데 우리 임원들은 대표팀이 떨어졌다고 우르르 공항에 몰려가 격려하기 바쁩니다. 이웃 일본 축구협회는 국제팀 조직들이 여전히 현장에 남아 바삐 움직이고 있더군요. 이곳 언론에서도 일본의 월드컵 이후 행보를 상세하게 보도하고 있고요. 치열한 축구 전쟁이 펼쳐지는 브라질에서 세계 축구의 흐름을 파악하고 인적 교류의 폭을 넓히는 것은 현 시점에서 우리 축구협회 등 관계자들이 당연히 해야 하는 일 아닐까요.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를 최소 20편 이상 전하고 싶었는데, 한국의 16강 진출 실패로 아쉽게도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남은 할 이야기들은 귀국해 다른 방식으로 풀어보겠습니다.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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