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재기자] 최근 한국 사회에서 '의리 열풍'이 불었다.
국내에서 충격적인 참사가 잇따라 벌어지자 사회 구성원간의 신뢰와 소통이 필요하다는 분위기에서 새삼스럽게 '의리'가 강조된 것이다. 의리파로 유명한 한 연예인이 광고까지 출연하며 촉발된 이 '의리 열풍'은 한국 사회를 다시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즉, 의리 열풍은 이기적인 한국 사회에서 정의와 원칙을 지키자며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는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이다. 과정을 무시한 채 결과만 중시하는 사회 풍토에 일침을 가한 것이기도 하다. 자기만 살겠다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짓밟는 행태에 경종을 울린 것이다.
의리 열풍은 그래서 분명 긍정적이고 밝은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의리가 부정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로 쓰이는 곳이 있었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한국 축구 월드컵 대표팀이었다.
홍명보호에는 의리 열풍이 아니라 '의리 논란'이 일었다. 의리를 다르게 해석한 것이다. 의리 열풍의 의리는 믿음과 정의 등 긍정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 반면, 홍명보호의 의리는 '제식구 감싸기'의 다른 말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제식구에게 무한 믿음과 신뢰를 줬으니 홍 감독의 의리도 분명 의리다.
23명의 월드컵 최종'엔트리'가 발표되자 홍 감독의 제식구 감싸기를 빗대 한 누리꾼이 '엔트으리'란 패러디를 만들었고, 이는 축구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23명의 엔트리 중 일명 '홍명보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선수들이 무려 15명이나 포함됐다. 대표팀이 홍명보 아이들 '동창회'나 다름없었다. 홍명보의 아이들, '그들만의' 월드컵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의리 논란을 보는 국민들은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공정하고 정당한 과정을 무시한 채 결과만을 추구하는 행태 때문이다. 제식구를 위해 원칙도 당당히 깨는 모습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를 침울하게 만들었던 결과 지상주의, 원칙 파괴주의를 한국 대표팀이 앞장서 하고 있는 모습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많은 논란을 일으킨 대표팀은 없었다. 월드컵 직전에 이렇게 많은 비난을 받은 대표팀은 없었다. 국민들이 하나 돼 지지하지 못한 유일한 월드컵 대표팀이었다.
스포츠라는 가장 공정해야 하는 분야에서, 홍명보호는 편법, 꼼수, 말바꾸기로 얼룩졌다. 홍명보의 아이들에 대한 의리만 지켰을 뿐, 축구팬들과 국민들과의 의리는 내팽개쳤다. 여론을 철저히 무시하며 소통과 단절했고, 아집에 사로잡혔다.
소속팀에서 최선을 다해 결실을 보여준 선수들에게는 상처를 줬다. 자격 요건이 됐지만, 아니 더 빼어났지만 홍명보의 아이들이 아니라 탈락한 이들이 분명 있다. 대표팀에 대해 회의감, 상실감을 들게 만들었다. 또 '대표팀 선수들이 젊어서 경험이 없다', '리더가 필요하다' 등 대표팀을 걱정하는 주변의 충언에도 홍 감독은 귀를 막았다.
부정적인 의미의 의리가 팽배했던 홍명보호, 뒤틀린 과정의 연속이었던 월드컵 대표팀, 결과는 이미 예견됐었다. 합리적인 정의 대신 공정하지 못한 과정 속에 '엔트으리'를 택했던 홍명보호는 처절한 실패를 맛봐야 했다.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통했는지 모르겠지만, 최고의 선수들이 나서는 최고의 무대에서는 '의리'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홍명보의 아이들이 이번 월드컵에서 한 일이 무엇이 있나. 논란의 핵심이었던 박주영은 두 경기 슈팅 한 개로 끝났다. 주장 구자철은 리더로서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고, 기성용도 그동안 보여준 실력만큼 제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센터백 듀오 김영권과 홍정호는 자동문으로 전락했다. 윤석영, 김보경, 지동원, 정성룡은 무엇을 했나.
홍명보의 아이들이 주축이 된 한국은 1무2패, 승점 1점으로 H조 꼴찌로 16강에서 탈락했다. 역대 최상의 '꿀조'라는 설레발이 있었다. 한국의 16강 진출은 기정사실처렴 여겨졌고, 8강까지 바라본다고 했다.
그런데 1차전 러시아전에서 가까스로 비긴 후, 2차전 알제리전에서는 2-4 참패를 당했다. 한국이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나선 동안 '톱시드'가 아닌 팀에 4골을 허용한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3차전에서는 벨기에 선수 1명이 퇴장 당한 수적 우세 속에서도 0-1로 패배했다. 참혹산 성적이다. 최상의 '꿀조'에서 '최악의 월드컵'이 탄생했다.
한국 축구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16년 만에 월드컵에서 1승을 거두지 못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홍명보호로 인해 한국 축구는 다시 2002년 이전으로 회귀해야 했다. 최근 3번의 월드컵에서 저력을 보이며 의미있는 성과를 쌓아왔던 한국이 다시 월드컵의 '변방'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이번 월드컵에서는 '非홍명보의 아이들'이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홍명보의 아이들이 아닌 데서 받았던 설움이 폭발한 것일까. 주류가 아니라는 한이 그들을 일깨웠던 것일까. 그들은 모든 것을 걸고 그라운드를 뛰었다. 그들의 모습에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진정한 홍명보호의 '영웅'이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대표팀 최고의 선수를 꼽으라면 당연히 손흥민이다. 막내지만 가장 국가대표다운 모습을 보였다. 차범근 SBS 해설위원은 손흥민의 분전에 "형들도 그처럼 욕심과 꿈이 있어야 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1골 1도움을 기록한 이근호, 장신 스트라이커의 위용을 뽐낸 김신욱 역시 홍명보의 아이들이 아니다. 그런데 국가대표의 모습을 그들에게서 봤다. 유럽파와 비교 당하며 천대받았던 설움을 투지와 근성으로 날려버렸다. 한국 축구의 미래를 밝인 이들은 유럽파가 아닌 K리거 이근호와 김신욱이었다. 3차전에는 다소 부진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오른쪽을 지킨 이청용 역시 비(非) 홍명보의 아이들이다.
홍명보의 아이들은 부진했는데 비(非) 홍명보의 아이들은 빛났다.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홍 감독은 자신의 애제자들이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하면서 한 단계 발전하고 성장할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일까. 이영표 KBS 해설위원은 "월드컵은 선수들 경험 쌓게 해주는 무대가 아니라 증명을 해야 한다"며 일침을 가했다.
선수 선발과 출전 권한은 전적으로 감독에게 있다. 감독이 책임져야 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제 홍 감독에게 물어봐야 할 때다.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성인팀 한 번 지도해보지 못한 경력에 개의치 않았고, 또 1년이라는 짧은 시간 핑계는 대지 않을 것이라 확언했다. 감독 홍명보의 월드컵 경험 쌓기로 합리화 시킬 것인가.
앞으로 홍 감독이 대표팀을 쇄신시킬지, 다른 감독이 부임해 대표팀을 변화시킬지, 지금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것 하나, 홍명보의 아이들 동창회, 그들만의 월드컵은 끝났다는 것, 초라하고 처절하게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 축구에 거대한 변화, 엄청난 후폭풍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지막 셋, 국민들은 다시는 이런 의리로 뭉친 대표팀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민들이, 축구팬들이 정의의 이름으로 대표팀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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