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영화 '들개'의 개봉을 맞아 배우 박정민을 첫 대면하러 가는 길, '파수꾼'(2011) 속 백희(백희준)의 모습이 자연히 떠올랐다. 상업 영화와 독립 영화를 넘나들며 이런 저런 얼굴을 보여준 그지만, 출연작 중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작품이 '파수꾼'이었나보다.
배우의 진짜 얼굴도 '들개'의 효민보단 '파수꾼'의 백희에 더 가까울 것이라 상상했다. 백희를 만나 효민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까 백희의 현존을 마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측은 빗나갔다. 내뱉는 모든 말에 망설임이 없었다. 던져진 질문에 대한 반응이 만나 본 어떤 배우보다 빨랐다. 그럼에도 경솔함이 읽히지 않았다. 심리전을 건너뛰고 직구를 날렸을 뿐, 매 답엔 핵심이 있었고 예의도 발랐다. '참 영리한 배우를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백희의 모습을 생각하고 왔다"는 말에, 박정민은 "'파수꾼' 때는 딱 백희준이었다"며 "늘 스태프들보다 먼저 와서 '자, 하자'는 말에 '네'라고 답하곤 했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그래서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에겐 아직도 장난을 못 친다"며 "'변했다'는 말에 상처도 받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KAFA FILMS 2014 개봉작인 '들개'는 사제 폭탄 만들기를 즐기는 20대 취업준비생 정구(변요한 분)가 폭탄을 터뜨려 줄 집행자 효민(박정민 분)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효민은 사건의 중심에 서길 두려워하는 정구와 달리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에너지로 상대를 자극한다. '파수꾼'의 백희가 어디서도 튀지 않는, 말 그대로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면 효민은 모든 평범한 질서를 거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파수꾼'은 첫 장편 영화였으니 '들개'를 처음 볼 때와는 느낌이 달랐어요. '들개'는 찍은 지 오래 돼서인지 제 연기에 집중해서 보기보단 다른 사람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죠. 상상마당 특별전에서 처음 봤는데, '베리 굿(Very Good)'이라 생각했어요. '파수꾼'을 영화제 때 긴장하고 봤다면, '들개'는 만든 사람들과 함께 편하게 봤죠."
영화의 개봉에 앞서 열린 KAFA FILMS 2014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그는 캐스팅 제안을 받고 자신이 연기한 효민이 아닌 변요한이 맡은 정구 역을 더 탐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박정민은 "정구 역은 제가 더 잘 할 수 있는 배역이었다"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고, 같은 시나리오를 받는대도 다시 정구 역을 연기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어쩜 한 치의 흔들림이, 돌려 말하는 법이 없다.
"잘 하는 것과 재밌는 것은 다르지만, 효민 역을 연기하며 재밌었어요. 정구에겐 제가 가지고 있는 모습이 많아 어쩌면 쉽게 연기할 수도 있었어요. 위험할 수 있는 부분이죠. 몇 작품 연기하진 않았지만 효민 역은 이제껏 했던 것들과는 또 다른 영역이었거든요.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이라, 하면서 통쾌했어요.(웃음) 혹자는 '효민이 진짜 있는 사람이야, 아니면 정구가 만든 환상이야?'하고 묻는데,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맙더라고요."
'들개'에서 효민의 전사(前史)는 깊게 드러나지 않는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족과 긴밀한 관계는 맺고 있지 않고, 다니던 학교에 더는 적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만 간접적으로 그려졌다. 박정민은 "영화로 효민이라는 인물을 너무 많이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며 "굵직한 선은 정구가 이끌고 그 역을 돋보이게 해줄 수 있는 이가 효민이라고 봤다"고 설명했다.

정구 역을 맡아 함께 연기한 배우이자 한국예술종합학교 동기인 변요한을 향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변요한을 가리켜 "원래 잘 하는 친구였고, 학교에서도 늘 돋보이는 친구였다"고도 말했다. 연출 전공으로 입학해 연기로 전공을 바꾼 자신에 대해선 웃으며 "없는 사람처럼 학교를 다녔다"고 낮춰 말하기도 했다.
"저와 다른 면을 지닌 사람이 있으면 부러워하고 치켜세워주곤 해요. 사실 저도 자존감이 세서 아무나 인정하진 않지만 변요한이나 이제훈 같은 사람들은 인정하게 되죠.(웃음) 류승완 감독님이 연출한 '유령'에선 이다윗과 함께 연기했는데, 그냥 볼 땐 아이같아도 연기할 땐 확 달라지더라고요. 제가 '인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건방져보일 정도로 잘 하는 것 같아요."
스스로 "자존감이 세다"고 언급한 만큼, 현장에서 연기 욕심도 남다를 터. 박정민은 "모든 작품에 있어, 영화라는 매체에선 누가 뭐래도 감독 말만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감독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도 "꼭 힘을 줘야 할 부분, 100개 신 중 5~6개 신에선 제가 하고 싶은 연기를 시도해보기도 한다"고 알렸다. "힘을 줘야 하는 부분에선 배우의 연기가 중요하고, 영화가 연극과 다른 건 100번도 찍을 수 있다는 것"이라며 "그런 면에서 '들개'의 김정훈 감독과 잘 맞았다"고 돌이켰다.
"김정훈 감독님은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님과 비슷한 면이 있었어요. 유한 외모와 말투를 지녔지만 그 안의 고집이 장난 아니죠.(웃음) 배우의 말을 들어주되 아닌 건 아니라고 말씀해 주시는 면도 그렇고요. 아닌데 맞다고 하면 둘 다 무너질 수 있는 일인데, 두 감독님은 함께 작업하기 무척 좋은 분들이었죠."
박정민은 오는 30일 첫 방송되는 SBS 새 드라마 '너희들은 포위됐다'로 시청자들을 만난다. 그는 "드라마 작업을 하면 하루에 20시간을 찍는 경우도 있는데, 예전에는 대기 시간이 너무 길었다"며 "이제 이승기와 고아라가 나올 때 같이 나와서 연기를 하니 대기만 하진 않고 연기를 하긴 한다. 이래서 좋은 역할을 하는 건가 싶다"고 말하며 "하하하" 웃었다.
다시 고백하건대, 박정민과 만남은 '파수꾼'의 백희를 떠올리며 시작됐다. 한 시간의 대화가 마무리될 무렵, 그에게서 백희보단 '들개' 속 효민의 얼굴이 더 짙게 겹쳐보였다. '파수꾼' 작업 당시엔 그 자신이 딱 백희 같았다더니, 역시나 배우란 작품을 따라 사는 것일까. 문득 박정민이 숨기고 있을 또 다른 얼굴들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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