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준기자] "기록은 깨지게 되어 있는 법이죠." 롯데 김시진 감독은 평소에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팀이 승리를 거둔 날에도 담담하게 덕아웃으로 들어오는 선수들과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치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난 8일에는 조금 달랐다. 이날 롯데는 잠실구장에서 LG 트윈스와 명승부를 펼쳤다. 5-4로 한 점 앞선 상황 9회말 투아웃. 아웃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팀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타석에 선 LG 오지환은 롯데 마무리투수 김성배가 던진 3구째를 받아쳤다. 잘 맞은 타구는 중견수 전준우와 우익수 손아섭 사이로 향했다. 주자 2, 3루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타가 된다면 롯데는 그대로 역전패를 당할 위기였다. 그 때 전준우는 타구를 끝까지 쫓아가 몸을 날리며 멋지게 잡아냈다. 팀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김 감독은 덕아웃에 함께 있던 권영호 수석코치와 손바닥을 세게 마주치는 등 평소와 다르게 승리의 기쁨을 격하게 나타냈다.
김 감독은 "나도 모르게 그랬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런데 그 날 롯데의 승리에 이어 김 감독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 한화 이글스 경기에서 삼성 선발 배영수는 6.2이닝 동안 11피안타 3실점(3자책점)을 기록하며 승리투수가 돼 시즌 10승째(3패)를 거뒀다. 그리고 이날 승리로 배영수는 한 가지 기록을 경신했다. 바로 김 감독이 갖고 있던 삼성 우완투수 최다승(111승) 기록을 넘어섰다.
▲'푸른 피의 에이스', 원조는 김시진
삼성 팬들은 배영수를 남다르게 여기고 있다. 경북고를 졸업한 2000년 삼성 유니폼을 입은 배영수를 '푸른 피의 에이스'라고 부른다. 입단 후 한 번도 팀을 옮기지 않고 꿋꿋하게 공을 던지는 그에게 붙은 자랑스러운 별명이다.
입단 첫 해 2패만 기록했던 배영수는 2001시즌 13승(8패)을 거두며 기대주로 떠올랐다. 2003년과 2004년 각각 13, 17승을 올리며 팀 마운드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배영수는 김상엽(현 NC 다이노스 코치) 이후 맥이 끊겼던 삼성 프랜차이즈 투수 계보를 잇는 선수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런데 삼성 명투수 계보의 원조는 따로 있었다. 바로 김시진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김 감독은 현역선수로 10시즌을 뛰었다. 1983년 삼성에 입단한 뒤 1988년까지 111승을 올렸다. 1989년 트레이드를 통해 롯데로 이적하기 전까지 거둔 성적이다. 1987년 23승을 기록하며 당시 현역 투수로는 처음으로 통산 100승 고지를 밟았다.
김 감독은 배영수의 통산 112승 기록에 대해 "나는 6시즌만에 거뒀다"고 껄껄 웃었다. 입단 첫해 17승을 거둔 김 감독은 이듬해인 1984년 19승을 기록했고 1985년에는 25승을 올려 프로야구 초창기 최동원(당시 롯데)과 함께 우완 특급투수로 꼽혔다.
김 감독은 "배영수가 앞으로 더 많은 승수를 앃기 바란다"며 자신의 기록을 넘어선 자랑스런 후배에게 덕담을 전했다. 배영수는 현역 투수들 중에서도 통산 최다승을 기록 중이다.
▲깨지기 힘든 기록 25승
김 감독은 1985년 25승을 기록했다. 당시 김 감독과 함께 삼성 선발진의 원투펀치를 이뤘던 재일동포 출신 좌완 김일융과 같은 승수였다. 둘은 무려 50승을 합작했다.
그런데 여기엔 사연이 있었다. 김 감독은 "시즌 막판 OB 베어스(현 두산)와 경기에 나가겠다고 했다. 당시 삼성을 맡고 있던 김영덕 감독은 등판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선수 김시진은 그 때까지 24승을 거두고 있었다.
김 감독은 "그렇게 던졌는데 개인 타이틀을 하나도 얻지 못한 게 조금 억울했었다"고 했다. 결국 마운드에 오른 김 감독은 승리투수가 됐고 25승으로 김일융과 함께 다승 공동 1위를 차지했다. 승률 8할3푼3리로 윤석환(당시 OB)과 역시 공동 1위에 이름을 올렸고, 삼진도 201개로 1위에 이름을 올렸다. 김 감독은 당시 선발과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등판하며 10세이브까지 기록, 구원 부문에서도 2위를 차지했다.
김 감독은 "당시에는 선발로 나온 뒤 하루 쉬고 그 다음에 불펜으로 등판하는 일이 예사였다"며 웃었다. 지금처럼 체계적인 관리나 로테이션이 정착됐다면 김 감독은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하며 자신이 기록한 통산 승수(124승)를 훨씬 뛰어 넘었을지도 모른다.
김 감독은 "(배)영수가 그래도 한 시즌 25승은 달성하지 못할 거 같다"고 웃었다. 등판 일정과 투구 이닝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는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 나오기 힘든 기록이다. 김 감독은 25승을 거둔 그 해 269.2이닝이나 던졌다.
김 감독이 배영수의 기록을 높이 사는 건 바로 부상을 딛고 재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배영수는 두 차례나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후유증 때문에 강속구도 사라졌고 한동안 평범한 투수가 됐었다.
두자릿수 승수를 마음먹고 올리던 그는 2006년 이후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특히 2010년에는 12패(1승)를 당했다. 승패가 뒤바뀐 셈이다. 이후 2시즌 연속 6승에 그쳤다. 하지만 부활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한 배영수는 2012년 12승(8패)을 기록하며 2005년(11승 11패) 이후 오랜만에 두자릿수 승수를 거뒀다. 그리고 올 시즌 또 다시 10승 고지를 밟으며 김 감독의 111승 기록도 넘었다.
김 감독은 "영수는 자신과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셈"이라며 "재활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이는 잘 모른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그 과정에서 기량 뿐만 아니라 자신감을 잃고 한계에 부딪힌다. 하지만 배영수는 그런 부분을 딛고 다시 마운드에 섰다"고 장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롯데 유니폼을 입고 가장 많은 승수를 올린 선수는 윤학길 전 코치다. 윤 코치는 1986년부터 1997년까지 롯데에서만 117승(94패)을 기록했다. 그 뒤를 103승을 올린 손민한(NC 다이노스)이 잇고 있다. 故 최동원은 96승을 기록, 롯데맨으로서 100승 달성엔 아깝게 4승이 모자랐다. 현재 롯데에서 불펜코치로 활동하고 있는 염종석도 현역시절 93승을 기록하며 팀 에이스 계보를 이어갔다.
롯데 현역 선수로는 송승준이 최다승 보유자다. 2007년 입단 첫 해 5승(5패)을 기록한 그는 이후 2011시즌까지 4시즌 연속 10승 이상을 달성했고 지난해 7승에 이어 올 시즌 거둔 6승까지 모두 70승(52패)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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