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필기자] "네? 대전 시티즌이요?
귀를 의심했다. 어느 팀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느끼고 고민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팀 환경이나 성적 등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기에 일단 자신을 선택해준 팀을 받아들였고 이를 악물었다.
대전 공격수 김병석(27)은 돌고돌아 올 여름 이적 시장 대전의 유니폼을 입었다. 팀 동료들처럼 청소년대표팀 이력도 없고 숭실대 재학 시절에도 빼어난 실력자로 평가받지 않았다. 고교 상비군과 학생선수권 대표로 선발된 적이 있었지만 모두 일회성이었다.
대전 구단 관계자는 "반신반의했던 영입이었다. 몸 상태나 모든 것이 나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을 해외에서 보내 과연 K리그에 빨리 적응할 수 있을까 싶었다. 유상철 감독도 고민을 많이 했다"라고 전했다.
김병석은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길을 걸어왔다. 2007년 숭실대를 중퇴하고 포르투갈 1부리그의 비토리아 세투발에 입단했다. 세투발은 포르투갈 남부의 작은 소도시다. 그러나 당시 세투발은 포르투갈 FA컵 우승 3회, 리그 우승 8회를 차지한 강한 팀이었다.
유럽 진출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화제가 되던 시기였기에 김병석이 도대체 누구냐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더군다나 숭실대에서도 크게 주목을 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대학의 강호였던 숭실대 입단 당시 윤성효(현 수원 삼성 감독) 감독 영입 대상에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숭실대조차 김병석의 포르투갈 진출에 놀랄 정도였다.
김병석은 비토리아 세투발에서 11경기를 뛰며 1골을 넣었다. 나시오날 마데이라와의 경기에서 후반 38분 데뷔골을 넣었다. 강등 위기에 몰렸던 팀을 구한 골이었다. 교체 출전해 조커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
하지만, 새 감독이 선임된 뒤 김병석의 팀 내 입지는 좁아졌고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2009년 J리그 몬테디오 야마가타로 발길을 돌렸다. 야마가타에서는 15경기 출전해 2골을 넣으며 선전했지만 2010년 부상으로 감독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운이 없다고 생각할 때 사간 도스에서 영입 제의가 왔다. 윤정환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는 팀이어서 한결 편하게 적응했다. 2011년에만 17경기에서 4골을 터트리며 팀의 1부리그 승격을 도왔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 해외로만 돌아다니면서 정신적 피로가 더해졌고 국내 복귀를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의 손을 잡아주는 팀은 없었다. 협상 테이블에서 꼬이기가 다반사였다.
결국, 김병석은 사우디아라비아 알 나스르로 시선을 돌렸다. 축구를 계속하는 것 자체는 좋았지만 낯선 환경과 답답한 문화는 그의 향수를 더욱 자극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K리그 입단을 시도했고 광주FC의 입단테스트를 받았다. 모든 부문에서 합격점이었지만 역시 돈이 문제였다.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 깎아 입단시키려는 구단의 사정은 그의 마음을 찢어놓았다.
이 때 그를 받아들인 팀이 대전이었다. 공격 강화를 노렸던 유상철 감독의 전략에도 딱 맞아떨어졌다. 초반 8경기에서 한 골도 넣지 못했지만 유 감독은 그를 기다렸고 스플릿 체제가 시작된 뒤 두 경기에 나서 모두 골을 넣으며 팀 승리에 공헌했다.
27일 전남 드래곤즈와 33라운드에서 김병석은 헤딩으로 결승골을 터뜨렸다. 강등권 싸움을 벌이고 있는 대전에서 그는 보물단지나 다름없다. 골잡이 케빈이 경고누적으로 부재한 상황에서 대체자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김병석은 "코칭스태프가 자주 챙겨주고 동료들도 배려해줘서 편하게 생활하고 있다. K리그의 첫 팀인데 (나를) 불러준 것 자체를 고맙게 생각한다"라며 팀의 상황과 상관없이 국내에서 뛸 수 있다는 것 자체에 행복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유 감독도 "J리그 경험도 있고 자기 기량은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자원이다. 연습 때도 잘해서 실전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계속 기회를 주면서 관찰 중이다. 성과를 내면 다른 팀들도 그의 기량을 인정하지 않을까 싶다"라며 만족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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