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여운 (광주일고-성균관대. 우투우타 181cm 85kg>
"내 좌우명은 간단하다. '지지 말자'다. 그런데 자꾸 막판에 지는 경기만 하고 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 속상하다."
지난해 4번이나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던 성균관대는 올 시즌 첫 대회인 춘계리그에서도 전승을 거두며 결승진출에 성공했지만 숙적 동의대에게 한 점 차 패배를 당하며 또 다시 눈물을 삼켜야 했다. 5번 연속 정상 도전 실패로 허탈감과 무력감이 극에 다다랐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성균관대 안방마님 윤여운은 팀 분위기는 괜찮다며 배시시 웃었다.
"이연수 감독님도 무척 아쉬워하셨죠. 열심히 한 것이 결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며 저희를 위로해주세요. 우승을 하면 그 날 당일은 기쁘고 좋겠지만 다음 날부터는 다음 대회를 준비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봐요."
대학야구계의 SK 와이번스로 불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훈련량과 빡빡한 연습 일정 등으로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성균관대의 주장답게 윤여운은 우승보다 더 값진 평정심과 인내를 배우고 있다며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윤여운은 군산중앙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해 이후 충장중학교와 광주일고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저는 여태까지 (훈련이) 힘들다고 소문난 곳만 찾아다닌 거 같아요.(웃음) 프로도 혹시 그런 곳으로 가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웃음).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가장 마지막에 쓰러지라고 하셨어요. 독하게 버티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뜻이겠죠. 그 말씀 잊지 않고 실천하려고 하고 있을 뿐이죠."
2007년 광주일고는 대통령배 결승에서 9회 윤여운의 끝내기 안타에 힘입어 서울고를 10-9로 제압하고 우승기를 들어 올렸다. 정찬헌(현 LG)과 배터리를 이루며 최고의 포수로 평가받았지만 청소년대표에 선발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고, 프로진출도 가능했지만 아버지의 고집에 밀려 대학진학을 선택했다.
"아버지는 더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대학 진학을 권하셨죠. 지금 생각하면 옳은 판단이었던 거 같아요. 고졸 포수가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잖아요."
작년 윤여운은 부상으로 육체적·심적인 면에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시즌 중반 왼손바닥에 스트레스 골절이 생겨 방망이를 쥐고 타석에 서는 순간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시즌을 마친 뒤 11월 수술을 했고 다행히 현재는 말끔히 나았다.
"팀 내 마땅한 포수가 없어 대회가 모두 끝나기만을 기다렸죠. 수술하고 석 달 정도를 쉰 것이 자꾸 맘에 걸려요. 성적을 내야 하는 4학년을 앞두고 준비가 소홀한 거 같아서요."
수비형 포수지만 타격도 괜찮다는 평을 받고 있는 윤여운의 최대 장점은 낙천적인 성격과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는 여유, 그리고 대범함이다.
"글쎄요... 힘들다고 생각하면 힘들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수밖엔 없죠. 어느 구단이건 뽑아만 주시면 열심히 하는 것만큼은 남들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 있어요."
허세환 감독과 이연수 감독을 존경한다는 윤여운은 선수생활을 마감하고 난 뒤에는 지도자의 길을 걷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재미있고 보람도 클 거 같아서요.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감독님들처럼 말이죠."
▲ 김민 (중앙고-고려대. 우투우타 179cm 85kg)
"남은 기간 다치지 않고, 준비해온 것을 전부 펼쳐 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포수로 남고 싶다."
광주서린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처음 접한 김민은 한 살 위 형(김정민)과는 달랐다.
"왠지 모르게 '포수'라는 자리가 끌렸어요. 형은 투수가 되고 싶어 했지만 저는 제 사인을 받은 투수가 한 타자 한 타자를 상대해 잡아낼 때, 볼 배합으로 내 수에 타자가 말려드는 순간의 짜릿함이 좋았어요."
광주 진흥중학교 1학년 때 막내 여동생의 병 치료를 위해 가족 전체가 서울로 이사를 했고 영남중학교와 중앙고를 거치며 타지 생활을 시작했다.
"다른 선수들은 야구를 더 잘하겠다고 전학을 하잖아요. 그런데 저희는 아니었죠. 순전히 동생의 병 수발을 들기 위한 상경이었어요. 서울에서 간이식 수술을 받고 다 나아질 때까지 부모님들은 솔직히 저희 형제에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거던요. 어릴 적부터 혼자 알아서 해야 했죠."
광주 출신 형제 야구선수로 유명했던 나성용-나성범(진흥고-연세대)과 더불어 역시 김정민-김민 형제도 나름 나란히 기대주로 평가를 받았지만 형은 현재 운동을 그만뒀고 김민만 야구를 계속하고 있다.
"광주에서는 나씨 형제와 함께 저희도 나름 유명했었는데.(웃음) 형의 못다 이룬 꿈을 저라도 대신해야죠.(웃음). 원래 형이 더 잘했는데..."
중앙고 시절 팀의 4번 타자를 맡아 대통령배와 무등기 4강을 이끌었던 김민은 광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걷고 있을 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중앙고가 강팀은 아니었거던요.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래도 계형철 감독님과 3학년 때 부임한 고영욱 감독님 덕분에 많은 걸 배웠어요. 정말 좋아하는 분들이에요."
선수층이 두텁기로 소문난 고려대에 진학한 김민은 동기 박세혁과 주전경쟁을 펼치며 치열한 시즌을 보내왔다. 2학년 땐 많은 경기에 나서며 우열을 가리기 힘든 본격적인 경쟁을 펼쳤지만 작년엔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며 부진했다.
"(박)세혁이도 잘 하거든요. 대회마다 컨디션이 다르니까 번갈아가며 마스크를 썼죠. 프로만큼 좋은 선수가 많은 건 우리 학교의 자랑이지만 반대로 선수 입장에선 큰 스트레스죠.(웃음). 투수리드, 볼 배합도 자신 있고 어깨도 약한 편이 아닌데 문제는 들쭉날쭉한 마인드에 있는 거 같아요. 잘되고 못되고의 차이가 너무 큰 게 제 최대 단점이죠. 하지만 꾸준히 게임을 뛰면 괜찮은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김민은 올해 주전포수 자리를 꿰차고 춘계리그에 나섰다. 다양한 포지션 소화가 가능한 박세혁이 3루수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언제든 자신을 대신할 라이벌이 건재하다는 건 불안요소다. 하지만 고려대 선수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제가 아니라도 뛸 선수가 많다는 건 늘 선발 오더에 드는 것부터 긴장 그 자체죠. 그래도 이젠 익숙해졌어요. 프로 가도 아마 이런 기분이겠죠?"
성실한 수비형 포수로 눈도장을 받은 김민이지만 타격에서도 일정 부분의 재능을 보여줘야 프로 지명이 가능할 것 같다며 남은 대회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노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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