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한국 대표팀은 4개국 초청대회에 참가해 전력을 점검했다. 그리스, 핀란드가 참가해 본선에서 만날 프랑스, 스위스 대비에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인터넷에서는 한 장의 사진이 주목을 받았다. 주전 골키퍼 이운재(37, 수원 삼성)가 방어 훈련에 집중하는 것을 뒤에 서 있던 김영광(27, 울산 현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무릎 부상으로 그라운드에 설 수 없었던 김영광은 후보였던 조준호(37, 대구FC)와도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했다. 선배들을 넘어서기 위한 승리욕이 발동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본선에서 이운재를 넘어서지 못했다.
당시 이운재는 갑작스레 불어난 체중으로 기량에 물음표가 붙었지만 눈부신 선방으로 원정 첫 승과 프랑스전 무승부 등을 이끌었다. 당연히 "역시 이운재"라는 반응이 쏟아졌다.
4년의 시간이 흘렀다. 대표팀 수문장의 경쟁구도는 여전히 이운재가 앞서가고 있는 가운데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정성룡(성남 일화)의 성장이 대표팀의 경쟁 구도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
정성룡은 지난 16일 에콰도르와의 평가전에 선발로 나서 풀타임을 소화했다. 국내 출정식을 겸한 경기여서 이운재의 출장이 예상됐지만 정성룡이 나섰고 몇 차례 위협적인 장면에서 선방하며 주목을 받았다.
정성룡은 "항상 준비하고 있다. 주전 경쟁을 벌이는 것이 힘들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허정무 감독도 "지금도 골키퍼 간의 경쟁은 계속되고 있다. 누가 경기에 투입되든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게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다"라고 정성룡을 출전시킨 이유를 밝히면서 "특별하게 나쁜 부분은 없었다"라고 호평했다.
허정무호 출범 후 포지션별 경쟁이 치열했지만 골키퍼 부문은 유일하게 별다른 경쟁이 없었다. 그러나 올 시즌 이운재가 소속팀 수원에서 킥 실수를 저지르는 등 우려스러운 장면을 보이자 허정무 감독의 근심이 쌓였다. 수원은 K리그 최하위로 처졌다.
반면, 정성룡은 FC서울과의 경기를 제외한 10경기에서 6실점하며 성남을 3위로 올려놓았다. 성남은 최소실점에 있어서도 경남FC, 제주 유나이티드에 이어 3위로 안정감을 과시하고 있다.
허 감독은 30명의 예비엔트리를 정하면서 설기현(포항 스틸러스), 김두현(수원 삼성) 등을 제외했는데, 부상으로 인해 경기 감각이 저하된 점을 이유로 꼽았다. 26명으로 다시 줄이면서는 강민수, 조원희(이상 수원 삼성), 김치우(FC서울), 황재원(포항 스틸러스) 등 4명을 탈락시켰는데 공통적으로 '경기력'이 판단 기준이었음을 밝혔다.
이는 골키퍼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허 감독의 표현대로 "여차"하면 누구든 최후방에서의 지휘를 충분히 할 수 있도록 준비돼 있어야 한다. 이운재가 본선이 임박해서도 제 기량을 발휘 못하면 주전 출전 기회는 정성룡, 김영광에게 넘어갈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골키퍼 포지션의 특성상 한 번 기용되면 쉽게 바꿀 수 없기 때문에 허 감독의 발언은 경험이 풍부한 백전노장의 분발을 자극하는 일종의 충격요법으로도 볼 수 있다.
이운재는 남아공월드컵에서 명예롭게 물러나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정성룡은 성장세 속에 주전 수문장 도전장을 내밀었다. 월드컵을 앞두고 급부상한 골키퍼 경쟁구도가 허정무호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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