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시나마 라이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제 착각이었어요. (이)승훈이는 국내를 넘어 아시아에서 나오기 힘든, 한 마디로 괴물이죠."
지난 시즌, 정확히 말하면 이승훈(22, 한체대)이 쇼트트랙에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을 선택하기 이전까지 아시아 빙속 장거리의 1인자 히라코 히로키(일본)와 경합을 펼치며 국내 지존 자리를 지켜온 최근원(28, 의정부시청)은 밴쿠버 동계올림픽 한국 선수단 1호 메달리스트(5,000m 은)이자 1만m에서 극적으로 금메달을 따낸 이승훈(5,000m 은, 1만m 은)에 대해 경쟁심을 떠나 경외심마저 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최근원은 2000년 최재봉 이후 7년 만에 세계 올라운드 선수권대회 본선무대를 3회 연속 밟은 한국 남자 빙속 장거리 최고 기록 보유자였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2009-2010 월드컵 파견선수 선발전 겸 제44회 전국 남녀 종목별 빙상선수권대회 남자 5,000m에서 1위 자리를 이승훈에게 내주고 말았다. 6분48초를 기록한 이승훈은 2006년 최근원이 세웠던 대회신기록(6분49초78)을 갈아치웠고 최근원은 그 뒤를 이어 6분51초81로 2위에 머물렀다.
"정말 오랜만에 1위를 빼앗겼어요. 잘 타는 후배 한 명이 생겨 저로선 새로운 자극이자 긴장감을 불어넣어 주네요."
당시 최근원은 이승훈에 대한 경계심을 보이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지만 위기감을 느꼈고 그것은 현실로 즉각 나타났다.

"(6분)30초대 진입은 저로선 불가능했는데 (이)승훈이가 단숨에 넘겨버렸죠. 국내 시합에서 제 앞에 가는 선수를 만난 것도 처음이지만 쫒아가면서 죽을 만큼 힘들었던 것도 (이)승훈이가 처음이었죠. 완전 스피드스케이팅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아요."
최근원은 올림픽 기준 기록을 통과하지 못해 밴쿠버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운명이 걸린 날, 이것저것 예상치 못한 불운이 겹치면서 손쉽게 딸 수 있다고 믿었던 올림픽 출전 티켓을 손에 쥐지 못했다. 올림픽 금메달은 하늘이 점지해 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최근원은 올림픽 무대를 밟는 것조차도 운이 따라줘야 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최근원은 최근 16명의 대표팀 출전 선수들의 선전을 국내에서 기원하고 있다. 밴쿠버 현지와는 전화연락을 통해 떨림과 아쉬움, 그리고 기쁨을 동료들과 나누며 지내고 있다. 경기를 끝내고 미리 입국한 선수들과 연락하고 만나는 것은 필수코스다.
"(모)태범이는 저의 룸메이트예요. 제 방에서 함께 있던 후배가 금메달을 딴 거죠. 정말 믿겨지지 않는 일이죠. 경기 끝나자마자 연락을 해와요. 선배에게 깍듯한 후배죠. (이)상화도 문자로 '근짱오빠, 나 일 냈어'라고 보냈어요. 문자와 반가운 목소리를 통해 올림픽을 간접 경험하고 있죠. 기쁨도 슬픔도 같이 하면서 말이죠."
1998년 태극마크를 단 이후 12년간 선수촌에서 함께 했던 이규혁 선배의 눈물 배인 목소리를 들으며 같이 흐느꼈고, 한때 룸메이트였던 이강석의 한숨도 남의 일 같지 않지만, 최근원은 그 무엇보다 같은 종목의 경쟁자이자 이제는 넘을 수 없는 산이 되어버린 이승훈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제가 한때 라이벌이라고 여겼던 것 자체가 실수였죠. 앞으로 배울 거 배우고 친하게 지내려구요.(웃음)"
최근원은 24일 새벽 이승훈이 1만m에 출전하기 이전에 이미 5,000m보다 더 놀랄 만한 성적을 낼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1만m에서 최소 은메달은 가능할 겁니다. 폼을 보면 알 수 있거든요. 완벽해요. 승훈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한계점의 수준이 다른 애죠. 기대해도 될 겁니다."
이런 최근원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이승훈은 12분58초55의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어 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올림픽 출전 문턱에서 3회 연속 좌절을 맛본 최근원은 선배의 눈물이 안타깝고, 후배의 선전이 뿌듯하고, 라이벌의 메달이 부럽지만, 그들이 흘린 땀과 노력 그리고 최선을 다한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진심을 담아 응원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이 지금의 성적을 낼 수 있게 된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최근원이 어렴풋이 깨닫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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