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박진영 기자] 이름만으로도 신뢰가 가는 배우, 역시 이병헌이다. 어떤 캐릭터든 찰떡같이 표현해내는 이병헌이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영탁을 통해 또 한 번 경이로운 연기 내공을 터트렸다. 이에 같이 연기한 박보영이 "슬럼프를 겪었다"라고 말할 정도. '믿고 보는 배우'인 것은 기본이고 매 순간 감탄이 터져 나오는 이병헌의 연기엔 그 어떤 찬사가 아깝지 않다. 그렇기에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는 재미도 배가 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 유일하게 남은 황궁 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여들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재난 드라마로, 이병헌과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박지후, 김도윤 등 '믿고 보는' 배우들이 완벽한 합을 이뤄냈다.
거대한 지진이 모든 콘크리트를 휩쓸고 폐허가 된 도시를 배경으로 아파트 안팎에 살아남은 인간들의 각기 다른 심리와 관계성을 탄탄하게 그려내 관객들에게 "올여름 최고의 영화"라는 호평을 얻었다. 이에 9월 5일 기준 364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으며 순항 중이다.
특히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제48회 토론토 국제영화제 초청과 함께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제96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영화 부문 한국영화 출품작으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뤘다.
이병헌은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재난 속 황궁 아파트의 새로운 리더가 된 영탁 역을 맡아 소름 돋는 연기력으로 '명불허전' 존재감을 뽐냈다. 다음은 이병헌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 이번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통해 만난 후배 박서준은 어떤 배우였나.
"늘 '허허' 웃고 건강한 청년의 모습이다. 일할 때도, 평상시 모습도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촬영할 때는 미세한 감정을 잘 표현한다 싶었다. 민성(박서준 분) 자체가 평범하지만 조금씩 변화한다. 그걸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그냥 허허 웃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같이 하는 동안 즐겁게 촬영했다."
-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재난물의 전형성을 뒤집고 진일보한 영화라는 평가를 얻었다. 완성본을 봤을 때 만족감은 어떤가.
"시나리오를 보고서 '내가 이런 블랙 코미디를 좋아했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되게 신선했다. 이전부터 있던 장르였지만, 최근엔 못 봤던 것 같다. 너무 신나서 영화 출연을 결정했다. 당연히 이야기적으로 좋은 영화가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후반이 어떻게 받쳐주고 완성도 있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서 갈림길에 선다. 긴 시간 동안 만들어놓고 기다려야 했는데, 그 길었던 시간이 우리에게는 오히려 도움이 많이 됐다. 감독님이 후반 작업을 한 땀 한 땀 열심히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성도 있게 잘 만들어진 것 같다."
- 어떤 지점에서 그런 만족감이 들었나.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웃기지만 긴장감이 해소되지 않고 점점 더 커진다. 사이사이 웃게 되는 정서가 있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몇몇 좋아하는 시퀀스가 있다. 영탁이 '아파트'를 부르는데 플래시백으로 갔다가 천천히 빠진다. 또 갑자기 중간에 생뚱맞게 공익광고 같은 영상이 나온다. 음악도 너무 좋고, 아주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다."
- 영탁을 어떤 인물로 해석했나.
"감독님과 상의를 했는데, 특이한 인물이 아니고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었으면 했다. 다만 삶 자체가 루저이고 우울함과 불쌍함이 가득한 소시민이길 바랐다. 그래야 사람들이 감정 이입이 쉬워진다. 주변에 있을 것 같고, 절대 악이나 선이 없다. 그런 인물이 모여서 감정과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영탁도 하나 남은 감정의 끈이 뚝 끊어지는 극한의 상황이 왔을 때 뭔가를 저지른다. 그렇게 변화되어 가는 것이 재미 중 하나인 것 같다."
- 안구 교체설이 나올 정도로, 돌아있는 눈빛이 인상적이다. 전반과 후반의 완급 조절은 어떻게 하려고 했나.
"두 군데 정도 저도 모니터를 보면서 '이런 눈빛이 있었나' 하는 순간이 있긴 했다. 내가 경험한 것은 감정을 연기로 표현할 때는 자신 있게 확신을 가지고 하지만, 해보지 않았던 극단적인 감정은 '이런 감정일 것'이라며 상상하면서 한다. 그런 것들은 힘들고, 보이기 전까지는 불안한가. '과연 이 정서를 고스란히 전달했나', '설득력이 없어서 사람들이 나에게 감정 이입을 했다가 빠져나오진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다."
- 필모그래피 사상 가장 꼬질한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비주얼인데 처음 거부감이 있지는 않았나.
"처음엔 팬들이 탈퇴할까 봐 걱정했다.(웃음) 그래도 그 인물에 가깝게 가야 하는 것이 맞는 거니까. M자 머리도 얼굴도 분장이었다. 처음엔 평평했던 머리카락이 권력이 커짐에 따라 각도가 커진다. 카리스마가 생기면서 머리 스타일도 점점 세우자고 계획을 했다. 눈 밑 벌건 부분도 뭔가 취해가는 느낌으로 했다. 도움을 많이 받았다."
- 영탁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힘들겠다 싶을 정도로 임팩트가 강했는데, 연기하면서 가장 힘들었거나 고민이 됐던 장면은 무엇인가.
"제일 확신이 안 서거나 어떻게 이해하고 이 감정을 내 것으로 만들지 고민을 제일 많이 했던 건 첫 등장이었다. 소화전에서 난리를 치는데 기괴한 소리를 냈으면 좋겠다는 주문을 막연하게 하셨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또 혜원(박지후 분)을 던지고 구역질을 한다. 온전히 이해하고 표현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 혜원을 던지는 장면에서 이해했던 영탁의 감정은 무엇이었나.
"그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건 정신줄이 끊어진 거다. 안에 있는 창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소리를 지르면서 싸운다. 자신이 집주인이나 마찬가지라고 억울함을 호소한다. 주민들이 따르던 리더였는데 바닥으로 내쫓는다. 그 억울함과 분노에 정신줄을 놔버리고 이성을 잃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눌려있다가 혜원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될 만큼 눈이 돌아있다고 판단했다. 영탁이 절대 악이었던 사람이라면 그 상황이 익숙하거나 생각을 하고 행동할 수 있지만, 변해버린 자신에 대한 감정적인 괴리가 있고 그것이 헛구역질로 표현됐다고 본다. 본래 자기 자신이라면 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한 괴리가 몸으로 나오는 증상이 헛구역질이라고 해석하고 연기했다."
- 이번에 함께 한 엄태화 감독은 어땠나.
"굉장히 말이 없고 디렉션도 없는 편이다. 그래서 막막한 감정을 가졌을 배우도 있었을 것 같다. 마음씨만 좋아서 자기주장이 없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파트' 장면 같은 경우 카메라를 미리 돌려놓는 센스가 있다. 그렇게 안 했으면 어쩔 뻔했나. 귀중한 장면을 살려낸 아이디어는 감독님에게서 나왔다. 생각해보면 헛구역질 같은 건 이걸 어떻게 하나 고민을 했지만 극단적인 상황까지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준 거다.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이디어가 있는 감독이다."
- 영탁은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기는 하지만, 그 전에는 우리 옆집에 존재할 것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를 너무나 리얼하게 연기해내 디스토피아물임에도 불구하고 현실감과 몰입감을 극대화한 것 같다.
- "배우는 사람들이 왜 저런 성격이 됐고 표정을 짓는지, 왜 저런 이상한 버릇이 생겼는지 관찰하고 연구한다. 배우는 그런 일반적인 감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어떤 정서든 다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정,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감정 연기를 하는 것은 재미있고 자신감도 있다. 반면 극단적인 감정, 상상해야 하는 건 확신이 없다 보디 더 힘들다."
- 그렇게 평범했던 사람이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면서 일순간 광기에 물들고 악인처럼 돌변한다. 이런 영탁이라는 인물이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 같다.
"평소 사람이 만나 대화를 하고 호흡을 하면 매너가 50%를 차지한다. 형식적인 매너, 보이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작 진짜 할 얘기는 30%다. 영화처럼 재난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 삶의 행동 하나하나가 생존과 직결된다. 솔직하게 까놓고 인간성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재미있다. 그렇기에 나름 민주적으로 주민 규칙을 세우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져가고 더 살아야겠다 싶어서 외부인들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갈등이 어쩔 수 없이 생긴다. 그러다 결국 서로를 죽이게 된다. 이런 매 상황이 인간의 양면성을 느끼게 한다."
- 이병헌 하면 '믿고 보는 배우'이고 연기 잘하는 배우의 대명사로 여겨지는데 앞으로 또 어떤 말을 듣고 싶은가.
"제일 듣고 싶은 말은 '연기 잘한다'가 아니라 '다음 작품이 보고 싶은 사람'이다. 다음 작품이 빨리 나왔으면 하고 기대되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게 중요하다고 본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미있어서 참여했는데 '내가 다수의 사람과 같은 코드를 가졌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다. 그래서 안도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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