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박진영 기자] 아파트 주민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배우들이 빈틈없는 연기 앙상블을 보여주며 감탄을 유발한다. 특히 중심 축을 이루는 이병헌을 비롯해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등이 신들린 연기력으로 극을 압도한다. 엄태화 감독도 '기적 같은 순간'이라고 할 정도로, '믿고 보는' 연기의 향연이 130분을 꽉 채운다. 배우들의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는 짜릿함, 이것만으로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볼 이유가 충분하다.
지난 9일 개봉된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 유일하게 남은 황궁 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여들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재난 드라마로,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박지후, 김도윤 등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완벽한 합을 이뤄냈다.
거대한 지진이 모든 콘크리트를 휩쓸고 폐허가 된 도시를 배경으로 아파트 안팎에 살아남은 인간들의 각기 다른 심리와 관계성을 탄탄하게 그려낸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관객들의 큰 호평 속 개봉 7일째 200만 관객을 돌파했으며, 개봉 2주차 300만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이에 엄태화 감독은 지난 16일 서울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페셜 GV를 열고 관객들을 만났다. 이날 모더레이터는 영화 '차이나타운', '뺑반'과 넷플릭스 'D.P.' 시리즈의 한준희 감독이 맡았다. 1시간여의 시간 동안 엄태화 감독은 한준희 감독의 질문을 바탕으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시작부터 고민하고 심혈을 기울인 지점, 이병헌과 박서준, 박보영의 새 얼굴을 담아낸 소감 등을 솔직하게 전하며 관객들과 소통했다.
- 대배우 이병헌과의 작업은 어땠나.
"모든 시나리오가 가는 분이다. 그래서 2주 만에 하겠다는 답이 왔을 때 너무 기뻤다. 의미있던 건 제가 박찬욱 감독님의 '쓰리 몬스터' 연출부에 있었을 때 주인공이 이병헌 배우였다. 같이 작업을 할 수 있다니 신기했다. 게다가 그때 파주 세트장에서 촬영했는데, 이번에 똑같은 세트장에서 크랭크인을 했다. 기분이 이상하고 좋았다. 선배님이 저에겐 되게 어려운 분인데 좋았던 건, 저에게 의견을 내실 때 '이게 좋아. 가자'가 아니라 '이건 어떨까요?'라고 질문을 해주셨다. 30년 넘게 주인공을 했으면 자기만의 정답이 있을 텐데도 조심스럽게 묻고 제가 선택하게 하셨다. 현장에서 다른 버전을 할 때도 '이 버전, 저 버전이 있는데 감독님이 알아서 쓰세요'라고 하셨다. 감사했다."
- 영화 속 영탁(이병헌 분)의 '아파트' 장면은 어떻게 촬영했나.
"절제되지만 좀 아저씨스러운 춤을 추면 좋겠다 싶었다. 선배님이 친한 분 중에 그런 춤을 추는 분이 있다고 배웠다고 하더라. 나중에 알았는데 너무 좋았다. 테스트할 때도 롤을 돌렸다. 그래서 테스트 컷에서 건진 것이 많다. 리허설 때와 컷 들어갔을 때가 좀 다르다. 리허설 때는 릴렉스한 상태라 좋은 연기가 나온다. 당시 배우도 많고 여러 가지가 맞아야 해서 준비도 많이 해야 했다. 리허설 때 카메라가 부딪쳤는지 흔들렸다. 세 테이크 정도 더 갔고 오케이가 난 후 편집을 하는데 리허설이 제일 좋더라. 뒤에 춤추는 사람들이 열심히 안 춘다. 흐느적거리는 것이 진짜 술 취한 사람 같고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이병헌 선배님도 테이크 갔을 때는 카메라를 안 봤는데 리허설 땐 카메라를 봤다. 이전과 이후 다른 사람이 되어있는 느낌을 받았다. 카메라가 흔들린 것도 지진이 일어나서 흔들리는 느낌이 들어서 얻어걸렸다. 그래서 테스트 컷을 쓰게 됐다."
- 박서준 배우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얼굴이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한 신랑 같았는데 점점 서늘해진다. 대사가 많지 않은데 변해가는 모습이 보여서 참 좋았다.
"민성(박서준 분)이는 관객들이 이입하기 편한 인물이라 그의 변화가 설득력이 있어야 했다. 이 인물이 변하는 순간들이 있는데 버전을 3~4개씩 찍었다. 태평양 마트 가서 주인을 해하고 짐을 챙기는 장면에서 누워 있는 주인을 감싸며 가족이 운다. 그걸 보는 얼굴을 찍을 때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어떻게 할지 모르는 표정이 있었고, '어쩔 수 없는 거야'라는 표정, 나아가서 그냥 더 싸늘한 표정이 있었다. 촬영 전에 배우와 그렇게 하기로 얘기가 다 되어있었다. '이 버전을 하자'며 찍고 보고 오케이한 후 다음 버전을 찍었다. 그렇게 섬세하게 감정을 잡아가려 했다."
- 민성은 리액션을 많이 하는 역할인데, 그간 투수같이 많이 던지던 배우가 받는 걸 하다 보면 답답할 수 있다. 하지만 본인의 것으로 만들면서 좋은 연기를 만든 것 같다.
"배우도 정말 만족스러워한다. 배우들이 다른 작품에서 못 본 자신의 얼굴을 보고 만족감을 느끼는데 서준 배우도 마찬가지다. 후반부에 문 앞에 나와 막고 있는 장면이 있다. 싸우는 영탁을 보다가 명화(박보영 분)를 보고는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라는 표정을 짓는 장면을 좋아하는데, 현장에서 '잭 니콜슨 얼굴이 보인다'는 얘기를 했다. 한 번도 못 본 얼굴이 나오는데 만드는 사람으로서 짜릿했고 좋았다. 보영 배우도 할머니에게 다그칠 때 절대 선이 아니라는 것이 설득되는 순간이었다. '남편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나' 하는 장면인데 그걸 혜원(박지후 분)이 본다. 냉장고도 가지고 나오지 않나. 그렇게 광기의 순간을 보여주는데 그 얼굴이 너무 좋았다."
- 명화도 양가적인 인물인데 박보영 배우라 명확하게 보였던 것 같다. 캐스팅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쓴 건가?
"이야기를 쓸 때 배우를 염두에 두고 쓰지는 않는다. 한준희 감독님이 '역할은 다 주인이 있다'라고 했던 것이 인상적이었고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보영 배우가 하겠다고 했을 때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이렇게 큰 배우가 먼저 하겠다고 해준 것도 기뻤다. 캐스팅 후 그 배우의 색깔을 최대한 드러낼 수 있게 각색을 하고, 지금껏 보여주지 못한 부분이 뭘지 같이 얘기하며 만드는 것을 즐긴다."
- 박보영 배우가 캐스팅된 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
"크게 있진 않은데, 보영 배우가 지금껏 한 것과 달리 가라앉은 톤, 차분한 느낌의 연기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명화가 입체적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옳은 얘기를 하는 사람이 고구마로 보이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렇게 보이지 않게 하려 배우와 얘기도 많이 하고 애를 썼다."
- 황궁 아파트 구현을 위해 3층 높이의 아파트를 짓기도 했는데 어떤 과정이 있었나.
"실제 아파트에서 촬영하는 것이 목표였다. 사람이 사는 곳은 촬영이 힘들어서 재개발 지역을 찾았지만, 시간이 안 맞았다. '그럼 지어야지'가 됐다. 세트처럼 보이지 않게 재개발 지역의 난간, 나무들, 버려진 소품들을 다 주워왔다. 극장 좌석 높이만큼 쌓아놓고 세트를 지은 후 다 배치를 했다.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인물이 사는 층수에 따라 평수도 맞췄다. 사람이 안 나와도 그 집에 누가 사는지 알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민성 명화 부부 같은 경우엔 직접 인테리어를 예쁘게 꾸민다고 했지만 어설퍼 보여야겠다 싶었다. 도균(김도윤 분)의 집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답게 건축가 그림이면 좋겠다고 했고, 영탁 집은 아파트가 세워질 때부터 산 사람이면 좋겠단 생각으로 디자인을 했다. 조명 같은 경우엔 재난 상황엔 직사광선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빛을 없애기 위해 마당을 가릴 수 있을 만큼의 지붕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산이 6억 원이었다. 대표님이 어이없어하기도 했다. 그만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무드가 중요했다. 어두운 밤에 찍을 때는 아무것도 안 보이게 찍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밝게 할 수도 없어서 소품을 이용해 하나하나 만들었다. 그런 것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을 거다. 민성이 영탁을 따라가면서 한 번만 봐달라고 하는 장면을 찍을 때도 조명을 이용해 흑과 백으로 이뤄진 세상을 얼굴에 표현하려 했다."
- 영화는 문화성, 시대성의 영향을 받는데, 기획하고 대본을 쓸 때 어떤 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나.
"단편 작업을 할 때는 정서나 순간의 느낌을 가지고 만드는 것이 좋았다. 스토리텔링보다는 좀 더 풀어놓은, 시 같은 느낌이었다. 장편으로 넘어오며 달라진 건 그런 느낌으로 2시간을 끌고 가기 쉽지 않다고 깨달았다. 하나의 키워드를 잡고 가는 것이 중요했고, 그걸 10년 전 '잉투기'부터 했다. 그리고 스스로 질문을 했다. 인터뷰하며 사람들을 만나면서 제 모습을 발견했다. 그들도 평범한 사람들이고, 미래가 불투명한 것에 불안함을 느낀다. 그렇게 제 이야기가 들어가고 질문의 끝에는 외로움이 남았다. 외로움을 붙잡고 끌고 갔고, 바로 전작인 '가려진 시간'은 믿음과 불신을 담았다. 질문의 대답은 영화가 끝난 후 선명해지기도 한다. 이야기를 나누고 리뷰를 보면서 찾아지는 것이 있다. 그래서 요즘 (리뷰 다 본다고) 눈이 빠질 것 같다. 영화는 살아있는 생물 같다. 의도와 결과물이 다르기도 하고 배우에 따라 톤도 달라진다. 물론 어느 정도의 통제는 하지만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관객들과 소통하면서 비로소 영화가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 역시 지금 완성되어 가는 중인 것 같다."
- 도균이라는 인물이 결국 쉽지 않은 선택을 하는데 연출의 의도가 궁금하다.
"도균은 짧게 나오지만 그가 가진 가치관을 입체적으로 끌어내려 노력했다. 김도윤 배우가 가지고 있는 느낌이 좋아서 캐스팅했는데, 처음엔 이기적으로 자기를 챙길 것 같던 사람이 알고 보니 반전을 가지고 있었다. 배우와도 처음에 도균은 흰 돌을 넣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이후 달라진다. 그렇게 저항하는 인물이 있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람이 있어서 세상이 바뀌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 영화를 볼 때 지금까지 얘기한 외에 주목해서 봐야 할 지점이 있다면 꼽아달라.
"스태프들, 배우들과 디테일한 설정을 채워 넣다 보니까 새롭게 보이는 부분들이 발견되더라. 손으로만 영화를 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민성이가 구하지 못한 여성의 손이 나온다. 그 여성을 구하려던 민성의 손, 민성에게 내민 영탁의 손, 사람을 구하려고 했다가 무기를 잡게 되는 민성의 손, 남을 도와주는 명화의 손. 손을 따라가도 재미있을 거다. 또 김선영 배우만 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뒤에서 깨알 연기를 하시는데 재미있고 웃기다. 편집된 것 중에 금애가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영탁을 철근으로 찌르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끝내주는 연기를 하는데 그걸 보여드리지 못해서 아쉽다. 전체 흐름상 안그래도 기진맥진한 상황인데 그 장면까지 나오면 너무 영화가 힘들 것 같아서 편집했지만 정말 보여드리고 싶다. 표정이 끝내준다."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