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유지희 기자] 끊임없이 오감을 두드린다. 감각의 역치는 점점 낮아진다. 그 순간, 마지막 시퀀스 3분20초는 가슴에 콱 박힌다. 밀물처럼 한순간 훅 밀려들어온 감정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한동안 소용돌이 친다. 다소 새로울 것 없고 제목 그대로로 좁혀지는 서사, 단순한 메타포에도 영화 '아이 엠 러브'(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수입·배급 영화사진진)의 특별함은 흘러넘친다.
이탈리아 명문가 레키의 안주인, 엠마(틸다 스윈튼 분)는 행복한 삶을 사는 듯하다. 그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세심하게 주방을 살피는 아내이자 자녀들에겐 따뜻한 애정을 주는 엄마. 머리띠로 꼼꼼히 빗어넘긴 블론드 단발과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낯선 이에게 보여주는 상냥한 태도까지 상류층의 모습으로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을 남몰래 껴안고 살아간다. 결혼 후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고향 러시아는 꿈 속에서만 만날 수 있고, 그곳의 수프를 좋아해주는 아들 에도(플라비오 파렌티 분)만이 현실 속 결핍을 채워주는 작지만 유일한 위로다.
완벽한 일상은 궤도를 이탈해가기 시작한다. 며느리에게 에도를 빼앗길 것 같은 불안함, 후계자로 지목된 남편 탄크레디(피포 델보노 분)와 아들 간의 갈등, 딸 베타(알바 로르와처 분)의 예상치 못한 고백이 엠마의 삶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다. 에도의 친구 안토니오(에도아도 가브리엘리니 분)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선다. 고독과 외로움에 더욱 더 내몰린 엠마는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 그의 음식을 맛보는 순간, 현실을 잊고 충만함을 느낀다. 여기에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딸의 모습은 기폭제가 된다. 한번 갈라진 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엠마는 안토니오에게 속절없이 빠져든다.
어릴 적 자신의 이름, 키티쉬를 기억해주는 안토니오와 사랑을 나누는 엠마. 그는 더이상 벽에 걸린 초상화 속 인물처럼 딱딱하지 않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은 첫사랑을 하는 소녀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행복을 향해 일제히 쫓아가는 감정엔 브레이크가 없다. 그러나 "행복은 참 슬픈 말이다"라는 극중 대사처럼 엠마의 행복은 현실을 더 메마르게 하고 누군가의 비극으로 점철된다. 그가 간신히 붙잡고 있었지만 결국 끊어져버린 끈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마지막 3분20초 시퀀스로 매듭지어진다.
'아이 엠 러브'는 첫장면부터 감각을 자극한다. 눈이 펑펑 내리는 밤, 조명조차 따뜻함이 느껴지는 실내, 눈을 찡그리게 만드는 햇빛과 피부에 와닿는 뜨거운 햇볕, 침샘을 자극하는 음식들,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 등은 클로즈업되거나 교차편집되면서 오감을 예민하게 한다. 여기에 인물의 심리 변화와 합을 맞춘 음악들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소파 위 첫 베드 신이 자극적이지 않을 정도다. 감각이 활짝 열린 상태에서 극중 주인공 엠마가 느끼는 감정은 더 크고 섬세하게 다가온다.
복잡하지 않은 메타포들은 몰입감을 더 높인다. 영화는 엠마를 둘러싼 두 욕망을 이분법적으로 표현하고 병렬적으로 배치한다. 비에 젖은 몸에 자신의 옷을 벗어 걸쳐주고 무릎을 꿇어 두 발에 구두를 신겨주는 남편은 한없이 다정하다. 그러나 엠마는 화려한 옷과 신발을 벗겨주고, 햇볕이 내리쬐는 풀 위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남자를 갈망한다. 영화는 대립되는 두 관계를 통해 하나의 욕망이 또 다른 욕망, 그리고 더 큰 욕망으로 흘러가는 과정을 선형적으로 밀도 높게 표현한다.
'아이 엠 러브'는 상류층의 불륜이라는 서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안토니오를 사랑한 엠마의 욕망은 외피에 불과하다. 자신이 완전히 잊힐 것 같은 두려움에서 만난 안토니오는 억눌려 있던 엠마의 욕망을 서서히 깨워주는 대상일 뿐이다. 영화는 현실을 간신히 지탱해준 힘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비로소 새 삶을 향해 내달리는 엠마의 진짜 욕망을 비춘다.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를 사랑하기 시작한 엠마의 모습은 작품의 제목과 직결된다.
뛰어난 연출력에 더해, 극을 이끌어가는 주연 배우 틸다 스윈튼의 연기는 흠 잡을 데 없다. 흐트러짐 없는 미소와 그 뒤에 잔잔하게 남는 씁쓸함부터 폭발할 것 같은 격정적인 감정까지, 틸타 스윈튼은 온몸으로 다양한 감정을 전하고 그 변화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특히 부유한 상류층 안주인의 고고함과 흐뜨러진 머리카락에 트레이닝복을 입은, 극과 극의 모습 모두는 완벽하게 근사하다.
한편 '아이 엠 러브'는 지난 3월 개봉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여름 3부작 중 첫 작품. 우리나라에서 지난 2011년 개봉한 영화는 지난달 26일부터 관객을 다시 만나고 있다. 러닝타임 119분, 청소년관람불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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