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뉴스24 권혜림 기자] 자정을 앞둔 밤, 숨 돌릴 틈 없이 사투가 벌어지는 응급의료센터. 후배 의사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한 대학병원 원장이 사고 후 주검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일하던 바로 그 병원이다. 그의 사망은 이 밤의 첫 번째 DOA(Dead On Arrival, 데스 온 얼라이벌, 도착 시 이미 사망)다.
상국대학병원 원장 이보훈(천호진 분)이 사고를 당한 곳은 부원장 김태상(문성근 분)의 집이다. 김태상은 막 병원에 도착한 엠뷸런스 안에서 허망한 표정으로 사망선고를 내렸다. 부원장에 따르면 원장은 그 밤 술에 취해 자신을 찾아왔다. 술을 마시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혼자 옥상으로 올라갔던 원장은 돌연 건물 아래로 추락했다. 평소 심근경색을 앓으면서도 술과 담배를 끊지 못했던 원장이 지병으로 실족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원장의 죽음을 마주한 의사들, 특히 원장을 오래도록 존경하며 그와 가까이 지냈던 응급의료센터 전문의 예진우(이동욱 분)는 부원장의 설명이 미심쩍다. 예진우는 원장의 사인이 정말로 심근경색 증상에 의한 추락인지를 의심한다. 하지만 심증만이 있다. 감히 입밖에 낼 수 없는 의혹이다. 예진우는 조용히 사건 현장을 둘러보고, 당직이 끝나자마자 형사를 찾는다. 하지만 머릿속 퍼즐은 쉽게 완성되지 않는다.
지난 23일 첫 방송된 JTBC 월화특별기획드라마 '라이프'(Life, 극본 이수연, 연출 홍종찬 임현욱, 제작 씨그널엔터테인먼트그룹, AM 스튜디오)는 극의 주요 인물일법한 원장의 사망 사건으로 시작한다. 정의롭고 인간적이며 모두의 신뢰를 얻어 온 병원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그리고 그의 사망 뒤 감춰진 진실이 있을지 모른다는 예진우의 의심은 극이 취하는 미스터리를 추동한다.
의사의 본분과 환자를 향한 헌신을 이야기하던 이보훈과 달리, 밀리고 밀려 원장 자리엔 한 번도 앉아보지 못한 김태상의 눈엔 권력욕이 있다. 성과급제 시행을 하달받고 반발하던 의사들 사이에서, 이보훈은 분노했고 김태상은 관망했다. 이보훈은 병원 운영의 수익을 우선시하던 재단과 매번 날을 세워 대립했지만, 김태상은 단지 적절해보이는 수위의 제스춰만을 취했다.
그에 더해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이노을(원진아 분)은 예진우에게 원장과 부원장의 다툼을 간접적으로 들었다고 전하며, 두 사람이 한밤중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길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냐고도 말한다. 이보훈의 장례식장에서 마주친 김태상은 기업이 내놓은 지방 의료원 파견안을 전달하던 때에 이어 꾸준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재단과 부원장의 결탁에 대한, 이보훈의 죽음 뒤 비밀에 대한 예진우의 의심은 어쩌면 합리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진우가 이노을에게조차 입밖에 내지 못한 일이 있다. 부원장을 향한 의심의 증거가 되거나, 혹은 이 의혹을 밝혀내는 데 장애가 될지 모를 사건이다. 이보훈이 죽기 전, 국민건강보험심사평가위원회의 심사위원이자 정형전문의인 동생 예선우(이규형 분)는 이보훈이 병원 지원금을 개인 계좌로 받은 정황이 있음을 귀띔했다. 예진우는 원장을 추궁하고, 의혹을 부인하기에 앞서 출처를 묻는 이보훈의 반응에 깊은 배신감을 느낀다. 진상을 더 캐묻기도 전, 이보훈은 풀리지 않은 질문들을 품고 죽어버렸다.
이보훈의 죽음 뒤에 어떤 정치적 다툼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예진우의 추측은 최근 병원이 맞은 급격한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죽은 이보훈은 재단의 움직임에 앞장서 반대했던 인물이었다. 병원조차 수익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는 기업 자본의 논리는 상국대병원에 일대 파란을 몰고 왔다. 의료인들을 성과주의로 평가하려는 시도가 한 차례 큰 반발을 맞았고, 이후에는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필수 진료과의 인력을 지방 의료원에 파견해 적자를 메꾸겠다는 계획이 시작됐다. 의료진과 재단의 갈등은 깊어졌다.
숫자만을 중시하는 병원의 신임 총괄 사장 구승효(조승우 분)는 철저히 자본의 논리에 입각해 병원을 개편하려는 사람이다. 병원 조직의 특수성이나 의학 용어는 잘 모르지만, 기업 경영에서 일궈 온 실력과 천재적 감각이 곧 그의 자신감이다. 필수과 인력들을 지방으로 파견해 윤리적 명분으로 수익 창출 목적을 가리려는 구상안 역시 그의 머리에서 나온 플랜이다.
산부인과와 응급의료과, 소아청소년과 등 필수진료과의 인력을 최소한만 남기고 지방으로 파견하겠다고 말하며, 구승효는 '강원도에서 출산하는 산모가 중국에서 출산하는 산모보다 더 많이 죽는다'는 자료를 인용한다. 파견 대상을 선정한 기준이 결코 수익이 아니라는, 이 선택이 의료 서비스 상향 평준화를 위한 인도적 지원이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게시물이 사내 게시판에 등장한다. 세 개의 파견 대상과가 수익 하위에 자리한 세 개의 과와 일치한다는 내용의 자료다. 올린이의 이름은 죽은 원장 이보훈이다. 흉부외과 센터장 주경문(유재명 분)은 이 글을 올린 이가 예진우일 것이라 직감한다.
'라이프'가 2화에 걸쳐 올린 서막은 여기까지다. 지원금 문제로 다툰 것이 이보훈과의 마지막 기억이 되어버린 예진우, 이보훈의 사인을 향한 예진우의 의심, 김태상과 구승효의 결탁 여부, 자본의 논리로 병원의 존재 가치를 재단하는 기업의 정책과 의료인들의 반발이 1~2화가 담은 갈등의 얼개였다. 병원과 의료 인력에 대한 투자의 명분이 수익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과연 옳은지,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정의로운 주장을 자본은 어떻게 어지럽히며 끝내 반문하는지를 묵직하게 꼬집었다.
기업의 논리와 병원의 윤리 사이, '라이프'의 인물들이 각축을 벌이는 이 갈등의 장에서 가장 큰 진폭을 보여줄 인물은 다름아닌 구승효다. 기업의 지원을 받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구승효는 그룹 최연소 CEO로 승승장구한 인재다. 적자 투성이인 상국대병원을 '대수술'해 수익을 내겠다는 것이 사장인 그의 유일한 목표로 보인다. 1화의 막바지에야 본격적으로 등장한 구승효는 2화에서 흔들림 없는 승부사의 면모를 펼쳐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종일관 여유롭고 능청스럽던 그가 복잡하고도 미묘한 표정을 지어보인 찰나가 있었다. 이미 인력이 부족한 흉부외과에서 쉼 없이 수술을 하고 수술실 구석에서 쪽잠을 자는 주경문의 모습을 우연히 본 순간이었다. 이력 서류에서 글로만 본 주경문의 일상, '거의 모든 콜을 받고, 36시간 연속 근무를 한다'는 그의 모습을 비로소 두 눈으로 마주한 구승효의 표정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서렸다. 기계처럼 일해온 기업의 장학생, 기업의 충신, 누군가에겐 기업의 개였을지 모를 구승효가 피의 최전선에서 싸워 온 의사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 장면이다.
'라이프'가 그려낼 각성은 곧 구승효의 변화일 것이다. 흔히 드라마나 영화 속 자본의 대리인은 악으로 재현돼 왔고, 그 성격은 대개 평면적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라이프'다. tvN 드라마 '비밀의 숲'을 통해 선과 악을 일차원적으로 경계짓는 일이, 사건의 표피에 천착하는 일이 얼마나 무용한지 보여줬던 이수연 작가의 이야기다. 작가의 전작을 통해 우리는 스쳐지나간 글자들이 단서가 되고, 인물이 보여준 찰나의 틈새가 변모의 여지로 기능하는 것을 목도했다.
'라이프'의 배경은 자본의 논리와 생명의 윤리가 충돌하는 격전지, 병원이다. 폭풍을 마주한 상국대학병원은 때로 잔악하기만 한 체제 아래의 여러 삶(Life)들을 대유한다. 이 드라마가 그릴 고민의 주제가 비단 의사들만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라이프'는 매주 월, 화요일 밤 11시 방송된다.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