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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아이 캔 스피크'의 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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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언어를 영화의 중심에 가져다 놓은 결정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기사 본문에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강산이 두 번 바뀐 세월, 구청장이 다섯 번 바뀌고 9급 공무원이 6급으로 승진한 시간 동안 옥분(나문희 분)은 매일같이 구청 민원 창구에 발도장을 찍었다. 꺼진 방범등을 고쳐달라는 민원을 제기하고 동네 주변을 수상하게 맴도는 사내에 대해 조사를 의뢰하는가 하면 기업의 비열한 재개발 꼼수도 고발해왔다. 자신의 터전인 전통시장의 생활 질서를 틈틈이 살피며 지적해대는 통에 동네 이웃들의 눈총까지 받기 일쑤다.

그간 접수한 민원만 수천 건인 옥분은 구청의 직원들에게 '블랙리스트 1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결기 찬 눈으로 구청을 찾는 그를 공무원들은 '도깨비 할매'라 부른다. 구청에 새로 부임한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 분)도 옥분의 존재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원칙과 절차만이 답이라고 믿는 민재는 흔들림 없는 표정과 말씨로 '도깨비 할매'를 능숙하게 응대할 수 있는 유일한 직원이 된다.

옥분은 늦게 배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친구 정심(손숙 분)이 부럽다. 그는 수준급 영어 실력자인 민재에게 과외를 부탁한다. 민재는 옥분에게 '경도' '위도' '생태학' '체질'과 같이 영 쓸 일이 없어보이는 영단어를 암기해오라는 조건을 내세운다. 골치아픈 존재를 떼어낼 심산이다. 그러다 민재는 옥분이 종종 남동생(성유빈 분)의 저녁 끼니를 살펴왔다는 사실에 뜻밖의 따뜻함을 느낀다. 그는 옥분의 제안을 수락하는 방법으로 고마움을 갚기로 결심한다.

'아이 캔 스피크'(감독 김현석, 제작 영화사 시선, 공동 제작 명필름)가 펼쳐내는 본격적인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옥분이 나이의 장벽을 극복하고 굳이 영어를 배우려 하는 이유, 그에 대한 호기심은 관객의 몰입을 높이는 단서이자 향후 일어날 사건들의 키(Key)가 된다.

영화는 가볍게 웃을 수 있는 휴먼 코미디물로 포장돼왔다. 서사는 비교적 단순하다.

대부분의 등장 인물이 소시민이다보니 진폭 큰 입체성을 지닌 캐릭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야기의 밀도는 극의 전개와 함께 점차 높아진다. 드러나지 않았던 옥분의 과거, 영어 과외를 통해 민재와 새로운 관계맺기를 시작하는 그의 현재가 이야기의 중심을 채우면서다.

이미 영화의 캐스팅 과정과 공식 행사를 통해 알려졌듯 영화 속 옥분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다. 그로 하여금 영어 학습에 대한 열망을 느끼게 만드는 정심 역시 소녀 시절 함께 만주로 끌려갔던 친구다. 비극의 시간을 함께 보낸 두 사람은 우정을 이어오면서도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정심이 세상 밖으로 나와 자신의 지난 삶, 역사의 미결된 문제를 직접 발언했다면 옥분은 이웃들조차 모르게 이를 숨겨왔다. 가족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처절한 시간들은 그의 입 안에 경험을 가두게 했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옥분은 자신과 정심을 위해, 또한 말해지지 않은 피해자들을 위해 기꺼이 각성한다. 미국에서 열리는 '위안부 사회결의안 채택을 위한 청문회'에 참석해 자신의 경험을 밝히기로 다짐한다. 그 누구의 통역이나 설명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경험을 제시하기 위해 영어 연설을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 캔 스피크'의 미덕은 도드라진다. 영화는 그간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몇 편의 작품들이 취한 논쟁적 선택을 성공적으로 비켜간다. 이 영화의 관심은 폭력의 스펙터클로 시선을 압도하거나 훼손당한 신체를 전시해 공분을 자아내는 데 있지 않다. 짧은 플래시백으로 지나가는 옥분의 과거는 시각적 자극을 노리지 않고도 충분히 관객의 마음을 건드린다. 성범죄 피해 여성을 묘사한 최근 몇몇 한국영화들의 문제를 떠올릴 때, 이 영화의 결정은 모범적 시선으로까지 여겨진다.

'아이 캔 스피크'는 피해자인 옥분이 자신의 몸,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경험을 발언하는 장면을 절정으로 삼는다. 피해의 증거로 고난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은 몸을 열어젖히고, "꿈이 짓밟힌 수많은 소녀들을 대신해 이 무대에 섰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그 어떤 반전보다도 강렬하다.

옥분은 말하는 주체다. 그의 삶은 타자에 의해 설명되거나 해석되지 않는다. 기어코 그 삶을 살아내고, 종국엔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긍정하게 된 인물의 모습은 피해자의 언어, 그리고 피해자의 것이기 때문에 생명력을 얻은 언어들을 영화의 중심에 가져다 놓는다.

그에 더해 모욕적 언사가 날아드는 청문회장에서 옥분과 네덜란드 출신 군 위안부 피해자가 손을 맞잡는 순간은 짧은 장면이지만 유의미하다. 국적을 초월한 두 여성 피해자가 서로의 경험을 경청하고 위로하는 대목이다. 군 위안부 문제를 다룸에 있어 종종 함정으로 작용해 온 국가주의적 접근을 간단하면서도 묵직하게 비켜간다.

영화가 이런 미덕들을 갖출 수 있는 이유는 결코 '착한 영화'여서가, 그러니까 메시지의 교훈성이 돋보여서가 아니다. 대중 영화로서 이 작품이 성취한 건강한 도덕성이 그 근간이다. 연출자의 섬세한 고민이 결마다 묻어난다.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오는 21일 개봉, 러닝타임은 119분, 12세이상관람가.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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