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K리그 클래식은 우승,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클래식 잔류, 승격, 챌린지(2부리그) 강등 등 어느 것 하나 정해진 것 없이 빡빡한 시즌을 보내고 있다. 개인 타이틀 경쟁도 그렇다. 그런데 눈에 띄는 이름이 시즌 내내 득점 1위 자리에 올라 있다. 2002 한일월드컵의 수혜를 입고 2003년 유망주로 등장했던 '패트리어트' 정조국(32, 광주FC)이다. 정조국은 현재 18골로 친정팀 FC서울의 아드리아노(16골)에 두 골 차로 앞서 득점 선두를 달리고 있다. 무엇이 30대 나이에 팀을 옮긴 정조국의 골 본능을 일깨웠을까? 창간 12주년을 맞은 조이뉴스24가 정조국을 만나봤다.
[이성필기자]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난 뒤 바닷바람은 더욱 거세졌다. 그렇지만 훈련을 멈출 수는 없다. K리그 클래식 잔류라는 목표 달성이 눈앞에 다가온 광주FC에게 대충은 없다. 늘 우승후보로 꼽히는 서울에서 뛰며 엘리트 코스를 거친 정조국에게 클래식 생존이 발등의 불인 광주는 어색한 팀이었다.
남기일 광주 감독은 올해 내내 정조국 칭찬에 바빴다. 남 감독은 "모든 스포츠가 그렇지만 선참이 해주면 후배들이 알아서 따라오게 마련인데 정조국이 그것을 보여줬다. 그 덕분에 올해 목표 승점을 이미 초과했고 잔류를 위해 모두 노력하고 있다"라고 전했다.
정조국을 목포에서 만난 것은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K리그 클래식 스플릿 그룹B(7~12위) 35라운드가 끝난 이틀 뒤였다. 인천전을 이겼다면 광주는 클래식 잔류를 확정지으며 남은 경기를 부담 없이 치를 수 있었지만, 축구의 신은 광주에게 쉬운 길을 허락하지 않았고 0-2 패배를 안겼다.
"광주에 와서 나 자신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광주의 임시 훈련 캠프인 목포축구센터에서 기자와 마주한 정조국은 "축구는 참 어렵다. 인천 선수들을 보니 정신적으로 준비가 정말 잘 됐더라. 한 경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인 부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았다. 또 한 번 각성하는 계기가 됐다"라며 0-2로 진 인천전부터 복기하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검붉은 서울 유니폼이 잘 어울렸던 정조국이 노란색의 광주 유니폼을 입은 것은 아직도 눈에 익지 않는다. 그는 "광주를 선택한 것에 대한 어려움은 전혀 없었다. 서울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결정이었다. 잘할 자신도 있었다. 광주가 시민구단이고 약팀이라는 평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라고 광주 이적을 결심할 당시를 돌아봤다.
그래도 지원이 좋은 기업구단에서 시민구단으로 와 급격한 환경 변화를 겪는 것이 정조국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뛰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놀라운 부분도 있다. 광주에는 젊은 연령대의 선수가 많다. 같이 생활하면서 서울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선수들의 마음가짐을 봤다.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정조국이 광주에서 가장 만족하는 부분은 상대 팀의 평가다. 그는 "서울의 후배들도 연락이 계속 온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시즌 시작 후 다른 팀 동료들이 광주가 경기하기에 까다롭다는 이야기를 정말 많이 하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하더라"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축구지도자 자격 C급 라이선스를 취득한 정조국은 올해 12월에는 B급에 도전한다. '절친 선배' 이동국(37, 전북 현대) 등 다른 구단 선수들과 만나 다시 공부에 열중할 계획이다.
30대 초반이지만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정조국은 과거를 돌아봤다. 정조국은 프로 무대 등장 당시 최성국 등과 함께 대형 유망주로 꼽혔다. 한국 축구의 공격수 계보를 이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데뷔 첫 해인 2003년 안양 LG에서 32경기 12골 2도움의 폭발력을 보여주며 신인상을 받는 등 찬란한 미래가 보였다.
그러나 2010년 FC서울에서 29경기 13골 4도움을 기록할 때까지 정조국은 그저 그런 선수였다. 이상하게도 정조국의 성장은 더뎠다.
그는 "주목받는 것은 스트레스였다. 그 당시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다 보니 거만, 자만했던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면 그것 또한 선수 생활의 자산이라고 본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생각도 고쳐먹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광주에 와서 300경기 출전도 넘기고 100골도 넣고 하니 한편으로는 '꾸역꾸역 잘 버텼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잘 이겨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스스로 칭찬해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데얀 통해 발전…올해 활약에 (이)동국이 형 기뻐해"
2008년 당시 인천에서 서울로 와 팀 동료가 된 데얀(35)의 등장은 정조국에게 큰 자극제였다. 그는 "처음에는 외국인 선수 살 돈으로 국내 선수나 키웠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왜 공격수가 없다면서 국내 선수는 안 키우나 싶더라. 그런데 데얀을 만나면서 그런 생각을 바꿨다. 이런 친구가 있어서 나도 발전할 수 있는 부분이 많더라. 이 친구와의 경쟁에서 이겨내겠다는 오기가 생기더라"라며 데얀과 한 팀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인 것이 자기 발전의 촉매제가 됐다고 밝혔다.
결과론이지만 중국으로 떠났던 데얀이 올해 서울로 다시 오면서 정조국이 광주로 향하는 상황이 맞물렸다. 그는 "서울에서 데얀을 보면서 참 좋은 친구라는 생각이 들더라. 90분을 뛰면 동료들의 볼을 정말 많이 받는다. 볼 터치 횟수가 많은 데 그만큼 볼을 받기 위해 많이 뛰는 것 아닌가. 잘 움직여야 하고 좁은 공간이나 앞, 뒤, 측면도 활용해 이동해야 한다. 그런데 골대 앞에서 슈팅도 많이 하고 기술도 있지 않은가.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같이 경기를 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느꼈다. 최고의 파트너였고 대단히 많은 깨우침을 준 친구다. 그 때 K리그 최고의 외국인 선수라는 것을 느꼈다. 아니 외국인이라는 수식어를 빼고 그냥 최고의 선수다"라고 데얀 칭찬을 쏟아냈다.
이동국을 보는 시각도 그렇다. 정조국은 "(이)동국이 형과 깊이 친한 것은 아니다. 대선배 아니냐. 그런데 형은 나를 보면 항상 아쉬워하신다. '조금 더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라며 늘 입맛을 다셨다. 지난해 12월 C라이선스 교육과정에서 만나 2주 동안 같이 공부하면서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다. 올해 내가 골을 터뜨리고 하니 참 좋아하시더라. 좋은 말도 많이 해줬다"라며 자신이 따라가야 할 롤모델임을 강조했다.
정조국은 재미난 말도 남겼다. "나이가 드는 것의 여부를 떠나 기술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체력이 떨어지더라도 내가 가진 기술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동국이 형이 나이를 먹어도 발리 슈팅을 잘 하지 않는가"라며 이동국처럼 오래 그라운에서 자신의 기술을 보여주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경쟁자, 동반자와 함께 한 시대를 보내고 있는 정조국에게 최근 국가대표팀 슈틸리케호 승선 이야기가 솔솔 나오고 있다. 슈틸리케 감독은 득점 선두 정조국이 뛴 경기를 관전하면 노트북에 따로 기록하는 등 관심을 두고 있다. 정조국은 2011년 6월 세르비아와의 친선경기가 가장 최근에 태극마크를 달고 뛴 경기다.
5년 이상 인연이 없었던 국가대표팀, 그의 재발탁론에 대한 정조국의 진심은 무엇일까.
<②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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