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림기자] 멜로 장르의 영화들로 오랜 세월 관객들의 지지를 얻었던 허진호 감독은 한 작품 속 남녀 주연 배우들의 역량을 비교적 고르게 뽑아낼 줄 아는 연출자다. 호평을 받았던 그의 작품들을 돌이켜보면 이는 더 명확해진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와 심은하, '봄날은 간다'의 이영애와 유지태, '행복'의 황정민과 임수정까지, 그가 내놨던 빼어난 멜로 영화들은 대개 출연 배우들의 '인생작'으로 남았다.
허 감독의 새 영화 '덕혜옹주'(감독 허진호, 제작 호필름)를 이끄는 두 배우는 손예진과 박해일이다. 일본에 끌려가 평생 조국으로 돌아오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역사가 잊고 나라가 감췄던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손예진은 덕혜옹주 역을, 박해일이 그를 고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노력하는 독립운동가 김장한 역을 연기했다.
'덕혜옹주'의 두 배우 손예진과 박해일은 각자의 위치에서 제 몫을 다했다. 불과 한달 남짓의 시차를 두고 개봉한 '비밀은 없다'에 이어, 손예진은 '덕혜옹주'로 또 한 번 관객과 평단의 극찬을 이끌어냈다. 허 감독 역시 손예진의 연기에 혀를 내두르며 "인생작을 한 달 만에 갱신하는 배우가 또 있겠나"라고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덕혜옹주'의 또 다른 무게 중심을 지킨 박해일은 노인이 된 장한의 모습으로 영화의 시작을 열었다. 영화의 서사를 가로지르며 덕혜를 고국으로 데려오는 숙원을 이루고, 극을 짙은 여운으로 마무리하는 역할을 소화했다.
영화의 타이틀롤인 손예진의 연기에 대해선 모두가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감정의 진폭이 큰 영화 속 덕혜의 일대기를 그는 한층 성숙해진 연기력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그의 연기가 더욱 빛나도록 가까이서 도운 박해일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 '덕혜옹주'의 개봉을 맞아 조이뉴스24와 만난 허진호 감독은 손예진의 연기에 대한 극찬은 물론이고, 절제된 연기로 영화의 톤을 살린 박해일의 존재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박해일, 손예진은 촬영 처음부터 친했어요. 손예진은 처음부터 박해일과 작업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던 것 같더라고요. 물론 여러 배우들이 박해일과 연기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해요. 박해일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있어요. 배우로서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람으로서 그래요. 사람들이 왜 '박선비'라 부르는지 알 수 있을만큼 좋은 사람, 괜찮은 친구죠."
허 감독의 칭찬은 이어졌다. 박해일의 친화력에 놀라움을 드러낸 그는 "정상훈과도 금방 친해졌고, 윤제문과는 전부터 관계가 좋았다"며 "라미란 역시 박해일을 좋아했다. 뭔가 진실된 느낌이 있어서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영화에서 이상한 역할도 많이 했지만, 왠지 그가 말하면 거짓말이 아닐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게 사실 아닌가"라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박해일도 자신이 인기가 좋다는 것을 알지 않을까요? 한 번 물어봤던 기억도 나요. '넌 왜 인기가 좋은 것 같니? 왜 널 모든 여성들이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요. 뭐라 답해줬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웃음) 영화 속 장한이라는 인물 자체가 극화된 면이 없지 않은데, 그런 면에서 박해일이 장한 역을 맡아 진정성을 가지고 간 느낌이 들었어요. 그가 연기함으로써 꾸며진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도 있죠."
박해일을 가리켜 "멜로가 되는 배우"라고 설명하기도 했던 허진호 감독은 영화 속 독립군 은신처에서 덕혜와 장한이 함께 보낸 시간, 이 시퀀스에서 그려졌던 묘한 긴장감에 대한 질문에도 답했다. 장한이 덕혜에게 "오향장육은 드셔보셨습니까?"라 물으며 후일을 기약하는 순간은 오랜 기간 덕혜에게 연정을 품어 온 장한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오향장육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되기는 했나봐요.(웃음) 거기서 '학교를 만들고 싶어요'라는 대사를 하긴 조금 재미가 없을 것 같았고, 그래도 감자를 찾아 먹을만큼 배가 고팠을테니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길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온라인으로 당시의 음식에 대해 찾아보다 오향장육이 적합할 것이라 생각했죠. 사실 그 대사를 편집에서 쓰지 않을 것도 같았는데, 막상 편집을 해 보니 장한이 직접적인 표현을 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더라고요. 어떤 구체적인 액션이랄까요? 사실 기술 시사 때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박)해일이는 촬영하며 너무 좋아했어요."
최근 필모그라피가 아시아 국가 간 합작 영화로 차 있던 허 감독에게 '덕혜옹주'는 약 10년 만에 다시 작업한 한국영화였다. 공간적 배경이나 영화에 깃든 시대 정신에 차이가 있지만, '덕혜옹주'에서도 '위험한 관계'에 이어 근대기를 다루게 됐다.
"'위험한 관계'에서는 1930년대의 화려하고 퇴폐적인 면모를 그렸어요. 그 시대의 느낌을 살려보고 싶어 작품을 선택한 배경도 있었죠. 그런데 '덕혜옹주'는 조금 달랐어요. 비극적인 삶을 산 덕혜가 공항에 귀국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거든요. 38년 만에 귀국을 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그를 찾아 데려온 사람들의 모습이 위로가 되는 느낌이었어요. 덕혜 뿐 아니라, 보는 나 자신에게도요. 덕혜가 독립투사나 위인은 아니잖아요. 어쩌면 독립운동을 해야 했을 수도 있는데 하지 못한, 그 삶에서 나름의 한이 있었을 것 같아요."
한편 '덕혜옹주'는 지난 3일 개봉해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8일을 기준으로 누적 관객 433만1천60명을 기록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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