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인터뷰에는 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권혜림기자] 높은 기대는 창작자에게 동력이자 독이다. 전작들의 성공은 더 화려한 캐스팅을, 더 많은 투자를 가능케 했지만 이는 다시 부담으로, 무거운 짐으로 두 어깨에 얹어졌다. 영화 '암살'(감독 최동훈, 제작 케이퍼필름)의 최동훈 감독에게 가장 큰 적은 그 자신이었고, 솟아만 가는 관객들의 기대감이었다.
'암살'은 '도둑들' '타짜' '전우치' 등을 통해 충무로 흥행 감독의 입지를 지켜 온 최동훈 감독의 신작이다. 1933년 상하이와 경성을 배경으로 친일파 암살작전을 둘러싼 독립군들과 임시정부대원, 그들을 쫓는 청부살인업자까지 이들의 엇갈린 선택과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을 그린다.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 오달수, 조진웅 등 충무로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한데 모인 작품이다.
스타 감독 최동훈이 메가폰을 잡았다지만, 한국 영화계에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흥행작이 '장군의 아들' 외엔 딱히 없었다는 사실은 우려로도 이어졌다. 무려 180억 원의 순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인 만큼 높은 손익분기점을 상회할 흥행 성적도 담보하기 어려웠다. 감독의 연출력과 톱배우들을 향한 관객들의 신뢰가 소재의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을지도 관건이었다.
지난 22일 개봉한 '암살'은 우려를 비웃듯 올해 한국 영화 흥행 기록을 모두 갈아엎으며 신나게 흥행 돌풍을 이어가고 있다. 30일 개봉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미션 임파서블-로그네이션'의 흥행세가 '암살'의 최종 관객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겠지만, 전작 '도둑들'도 넘어선 초반 흥행 성적은 분명 기대 이상이다.
영화의 개봉을 맞아 조이뉴스24와 만난 최동훈 감독은 약 5개월 동안 진행됐던 '암살'의 촬영과 4개월 넘게 매달렸던 후반 작업 시기를 가리켜 "진짜 '빡센' 시간이었다"고 말하며 웃어보였다. 그러면서도 "높은 기대치를 비롯해 모든 것이 부담이었지만, 그 정도 예산과 이런 기대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며 "정말 열심히 했기 때문에 흥행이 어떻게 되든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걱정이 되긴 했죠. '큰일났다. 내가 왜이러지?' 싶고.(웃음) 가솔린 가게 신을 쓰면서는 '이걸 영화로 어떻게 만들지? 가솔린이 터져야 하는데, 미쳤다' 라고 생각했어요. 원래대로라면 후반부에선 백화점 3층에서 총격이 이뤄졌어야 하는데, 돈이 더 드니 2층으로 바꿔 찍었죠. 한국 영화 시장이 아무리 커졌다고 해도 그 정도의 돈이면 굉장한 제작비거든요. 잠이 안오던 시기가 있었는데, 촬영에 들어가니 그런 생각이 사라졌어요. 부담은 잊고 열중해서 찍었죠."
여자 주인공 안옥윤 역의 배우 전지현은 '암살'이 언론 배급 시사를 통해 첫 공개됐을 당시부터 뜨거운 호평을 얻었다. 영화 '도둑들'과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통해 다시 전성기를 맞은 그는 직전의 작품들에서 보여줬던 밝고 유쾌한 표정을 과감하게 버렸다. 만주에서 가족을 잃고 독립 투사가 된 여인이자 명사수인 안옥윤 역을 맡아 진중한 얼굴로 극을 끌고 간다. 전지현을 향한 호평에 최동훈 감독은 "뿌듯하고, 너무 기분이 좋다"며 "전지현은 좋은 배우"라고 극찬을 시작했다.
"전지현은 강박이 없는 사람이에요. 아주 시원시원하죠. 이를테면 저는 안옥윤이 (미치코인 척을 하고) 집사를 만나 이야기하는 장면이 연기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김의성 선배와 '어떻게 할까?'라며 이야기를 했어요. 집사가 안옥윤에게 딱 붙어서 '아가씨, 더 궁금한 점이 없으십니까?'라고 말하고, 안옥윤이 '응' 하고 돌아서는데, '어, 좋다' 싶었죠. 김의성 선배는 '와' 하면서 감탄했고요. 제가 엄지를 들고 전지현에게 가서 '어땠어? 난 지금 굉장히 좋은데'라고 말했더니, 전지현은 '왔어! 뭔가 왔어! 한 번 더 갈까요? 어떻게 할까?'라고 하는거죠.(웃음)"
대표작인 '타짜'와 '전우치'를 비롯해 천만 흥행작 '도둑들'까지, 최 감독의 영화엔 분위기의 명암을 떠나 다소 염세적인 기운이 흐르곤 했다. 웃음기와 재치를 잔뜩 버무린 '도둑들' 역시 주인공 마카오박의 정서는 어둡고 탁했다.
"사실 주인공들이 다 고독하고 염세적인 것은 맞아요. 저 자신은 늘 긍정적이라서, 저를 보면 제 영화에서도 늘 유쾌한 사람이 주인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에요.(웃음) 타인과 잘 소통하지 못하는 마카오박도 염세적이었죠. '암살'의 안옥윤도 비슷해요. 염세적이라기보다는 작전을 위해 가만히 있는 고독한 사람이죠. 결론적으로는 안옥윤을 통해 '일제시대를 겪긴 했지만, 우리가 시대의 흐름을 잘 넘어왔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16년 전 임무'라 말하며 염석진을 죽여버리는데, 그런 강인함 같은 걸 보여주고 싶었죠."
최 감독의 설명대로 영화는 밀정 염석진의 최후로 막을 내린다. 친일파 청산은 여전히 한국 사회의 시대적 과제로 남아 있다. 그래서 '암살'의 결말은 현실을 과감하게 뒤집는 판타지에 가까워보인다.
"앙금이 남아있지만, 우리는 그렇게(안옥윤처럼) 하지 못했죠. 서사는 어떤 식으로든 위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너무 통쾌하게 가긴 싫었어요. 누군가는 '더 통쾌하게 갔어야 흥행이 되는데'라고 말했지만, 애초 목적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알싸함' 같은 거였어요. '울어라'가 아니라 '아, 울뻔 했네' 싶은 것 있잖아요. 그것이 더 좋은 표현이라 생각해요."
이하 최동훈 감독과 일문일답
-'전지현의 최고작'이라는 평이 눈에 띄더라. 그 외에도 배우들에 대한 호평이 많다.
"배우나 사람에게나 여러 면이 있지 않나. 전지현에게도 여러 면이 있다. '엽기적인 그녀'나 '도둑들', 혹은 드라마에서 밝은 면만 보여주는데 어두운 면을 보여주면 우리가 생각하는 면과 다른 것이 나올 것 같았다. 하정우나 이정재는 워낙 잘 하는 배우지만, 거기서 전지현의 존재감이 전혀 눌리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흔히 여배우가 주인공을 하면 흥행이 안된다거나 관심을 끌지 못한다고들 하는데, 편견이라 생각한다. 김혜수, 전도연, 손예진도 저는 그정도의 존재감이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여배우에게 볼 수 있는, 남배우와는 다른 멋진 것이 있다.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전지현을 다 좋아했다. 연기를 못하면 현장이 안 돌아가고, 감독은 악착같이 뭔가 만들어내려 하고, 모든 비난의 화살은 배우가 받는데, 그런게 전혀 없었다. 쭉쭉 해나가니까. 전지현을 향한 호평이 좋다. 배우가 기억되는 게 좋다. 감독이 기억될 수 있는 방법이 그것이니까.(웃음)"
-하정우나 조진웅, 이정재 등 다른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하다.
"여러 반응들이 있더라. 하정우가 좋다는 반응도, 이정재, 조진웅이 좋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 감독이 배우들을 잘 배치해야 하는데, 연기 전체를 콘트롤할 수는 없다. '말을 이런 식으로 해라'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같이 느끼는 과정이 필요한데, 뭔가 굉장히 좋았다. '서로 잘 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조진웅은 덩치가 사람을 압도할 만큼 크지 않나. 그게 너무 좋다. 감독에게 '연출이 뭐냐'고 물어보면 참 애매하다.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야 하는데, 흔들리면 안 된다. 적재적소에서 뭔가를 발휘하는 것이 감독의 일이다. 좋은 배우를 만나는 것이 연출의 반, 아니 그보다 더 된다. 그들과 소통하는 시간이 중요한 것 같다."
-여성 저격수 안옥윤의 극도로 높은 능력치나 그가 대장을 맡게 되는 설정 등 여성 캐릭터를 다소 기계적으로 전면에 내세운 느낌도 든다.
"안옥윤은 연약한 사람은 아니다. 강인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뽑혔을 것이다. 작전이 시작되고 저격했을 때, 너무 훈련 잘 받은 나머지 액션영화에 나오는 다른 주인공 여자처럼 하길 바라진 않았다. 긴장하고, 참고, 기다리고, 쏘고, 머릿속이 텅 비는, 그 헐떡거림과 어렵게 해나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싶었다. 이 영화 전체가 남자로만 채워졌다면 그런 모습들이 획득되지 않았을 것이다. 일사천리로 쏘고 담배를 물고 그런 모습이 아닌, 열망 가득한 마음으로 조금씩 멀리 좇아가는 느낌을 가져가고 싶었다.
영화 속 안옥윤에게 본질적으로 나라가 없으나 대신 집이라는 건 있다. 이 여자에게 집은 '잃어버려서 어딘지도 모르는' 어떤 곳이다. 어릴 때 집에서 나와서 아주 먼 길을 지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 두 세가지의 스토리라인이 같이 가는걸 좋아한다. 현재적 임무로 저격이 있고, 존재적 인간으로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운명에 가깝게 가는 것이다. 그런 두 가지 이야기를 같이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고 이 여성만 살아서 모든 것을 본 사람으로 남길 바랐다. 상징 같은 건 아니지만, 여자가 살아남아야 세대가 계속된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이경영, 박병은 등이 연기한 악역들은 하나같이 평면적이다. 고민은 없었나?
"이경영 선배가 맡은 강인국은 '나쁜 놈'이다.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사람이다. 근엄한 나쁜놈이 아니라 경박한 사람 있지 않나. 무게감이 있는 대신, 돈을 보면 눈이 반짝반짝하는 사람. 박병은이 연기한 카와구치는 '쟤 뭐하는 놈이지?' 싶은 느낌이 들길 바랐다. 차갑지 않나. 사이코패스 느낌이길 원했다. 직업 정신이 투철해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인물. 이경영 선배야 워낙 주연 배우로 활약해 왔고 연기를 잘하는 분이니 더 말이 필요 없지만 박병은도 잘했다. 그런 류의 이상한 느낌을 주기가 어렵지 않나. 그러다보면 진짜 이상한 사람이 되니까.(웃음) 박병은은 그런 지점을 지점을 잘 살렸다. 오디션을 봤는데 눈에 딱 띄더라. 하정우가 연기한 하와이피스톨과 가장 많이 마주치는 인물이다. '이 친구랑 하정우의 기(氣)와 온도가 잘 잘 맞아야 할텐데' 싶었는데, 다행히도 같은 대학 선후배 사이고 잘 아는 사이더라. 난 운도 좋다.(웃음)"
-결말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살부계'라는 설정과 안옥윤-강인국의 관계를 통해 부친살해의 모티프를 일차원적, 직접적으로 차용했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이 있는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강인국은 그 시대 난리통에 돈을 버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초반엔 집안의 식구들이 각자 의견이 달라 풍비박산이 된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 현대극에서는 잘 쓰기 어려운 코드다. 시대극으로 가면 일종의 원형 같은 느낌으로 그런 코드를 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 진영의 인물, 혹은 무정부주의자로도 알려졌던 김원봉을 존재감 있는 캐릭터로 만든 것 역시 회자되고 있다.
"영화를 준비하며 '이 양반들, 정말 대단했구나' 생각했다. 돈 한 푼 없이 저 중국 시골에 가서 사는 것을 상상해보라. 그런데 매일 누군가 자기를 죽이러 오고, 도망을 다녀야 한다. 그걸 다 하면서 산 사람들이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인데. 찍다가 스태프들과 '애국심이 막 생기지 않아?' '응, 막 생겨' 같은 대화를 하곤 했다.
김구와 김원봉은 당대 무장 독립운동의 양대 산맥이라 생각한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많지만 이 분들은 계속해 무장 투쟁을 한 분들이다. 김구와 김원봉은 계속 잘 지내지만은 않았다. 1937년부터 합작이 이뤄지는데 영화는 그 전 상황, 합작을 도모하려고 간을 보는 시기를 배경으로 삼았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좀 들어있다. 좌우가 어찌됐든, 임시정부 활동, 의열단 활동은 다 조명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원봉 역 조승우는 흔쾌히 우정 출연 제안을 수락하던가?
"김원봉은 반드시 조승우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그 얼굴로 기억돼서 관객들이 '저 사람이 누구길래 조승우가 저걸 했지?'라고 생각하길 바랐다. 조승우는 흔쾌히 수락했다. 중국 상해에서 5일 간 찍은 분량이다. 오자마자 '여기가 상해인가?' 하기도 전에 '자, 1945년부터 찍읍시다'라고 하면서.(웃음)"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