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영만의 걸출한 원작은 입심 좋은 감독의 현란한 말빨로 재구성됐다.
캐릭터들은 활어처럼 펄떡이면서 원작과는 또 다른 타짜들이 됐다.
고니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정마담은? 고광렬과 한쪽 팔을 아귀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독설을 날리던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평경장은 자신의 화투 기술을 이렇게 정의한다. "화투를 거의 아트의 경지로 끌어 올려서 내가 화투고 화투가 나인 몰아일체의 경지에 이른, 혼이 담긴 구라!" 어디 평경장 뿐일까, 최동훈 '사짜 월드'의 인물들은 모두 구라에 능하다.
'범죄의 재구성'에 이어 사기꾼들의 혓바닥 공력은 '타짜'에 이르러 한층 더 현란해졌다.
더 그럴 듯하고 생생하며 내공 9단의 '대사빨'에선 연신 스파크가 튄다.
영화에서 대사는 곧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할 수 없으면 2시간의 영화 동안 집중하기란 불가능해진다.
영화판 선수들은 이걸 '태운다'고 하는데 일단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돼야 롤러코스터를 태우든 고속 3회전이든 드라마틱한 사건을 경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구공장 직원에서 하루아침에 인생 막장을 경험하고 타짜가 된 고니, 최고의 타짜 평경장, 도박의 꽃 정마담, 소심하고 겁 많으면서도 도박판에 빠꼼한 고광렬, 돈줄에 기생하며 판때기 선수로 뛰는 박무석, 최고 타짜들의 손모가지를 자르는 무시무시한 아귀, 그 아귀에게 한쪽 귀를 잃은 경상도 최고의 타짜 짝귀. 이 다양한 캐릭터를 살아있게 만드는 최동훈의 대사빨은 그야말로 판타스틱하다.
단 한씬에 출연한 '짝귀'조차 묵직하게 느껴질 만큼 다양한 캐릭터들이 각각의 무게를 잃지 않으면서 영화를 관통한다. 한 편의 영화, 기껏 해야 2시간 남짓의 영화 안에서 몇 명의 캐릭터가 관객들의 머릿속에 기억될 수 있을까.
'범죄의 재구성'에서도 그랬듯 최동훈 감독은 캐릭터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소개하는 방식을 취한다.
"도박의 꽃이 누군지 아니?" 평경장(백윤식 분)의 이 대사 뒤에는 도박장 안에 있는 묘한 매력을 발사하는 정마담(김혜수 분) 모습이 붙고, "오늘 판에 이상한 아저씨 하나 낄 거야." 정마담의 대사 뒤에는 따발총 수다 고광렬(유해진 분) 씬이 등장한다.
몇 장면 등장하지 않는 아귀와 짝귀가 긴장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등장에 앞서 평경장이 대단한 전설을 얘기하는 냥 썰을 풀었기 때문이다.

조승우는 강렬한 연기로 시종일관 시선을 사로잡는다. 고니는 이 영화의 확고부동한 원탑이며 가히 조승우 최고의 연기이자 캐릭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를 본 뒤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를 물었을 때 나오는 답변은 이상하게도 천차만별이다. "넌 세상이 아름답고 평등하다고 생각하니?" "썅 간나새끼, 세상이 아름답고 평등하면 우린 뭘 먹고 사니?" "죽을라면 대통령 불알은 못 만지냐." "X 무서우면 시집가지 말아야지." "화투는 손이 아니라 마음으로 치는 기지." "법? 아직도 그렇게 뜨뜨미지근한 걸 믿어?" "천하의 아귀가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평경장, 고광렬, 짝귀, 아귀 등 인물들이 뱉어내는 대사들은 이렇게 수산시장 수조의 활어처럼 펄떡펄떡 뛴다.
이게 바로 최동훈식 캐릭터의 재구성이며 '혼이 담긴 구라'다.
고니 도박에 빠지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스물여섯 가구공장 직원 김곤은 우연히 사기 도박판에 끼게 되고 누나의 위자료를 몽땅 날리면서 ‘갈 때까지 간 놈’이 된다. 갈 때까지 간 놈이 택할 수 있는 건 빤하다. 만신창이 폐인이 되거나 혹은 타짜가 되거나. 백지의 어린아이 같이 천진했다가 야수 같이 폭발하기도 하는 고니의 진폭이 큰 변화는 이 캐릭터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결국 이 영화는 고니라는 인물이 인생의 파도 앞에 패배하는 과정이다. 아무리 이겨도 승자가 될 수 없는 도박의 아이러니, 발버둥치는 인간, 뭐 그런 거다.

정마담 "너구리 네 뇌 속엔 마요네즈만 들었니?" 독설과 색기, 그 바닥에서 닳고 닳은 여자의 노련함, 카리스마가 넘친다. 어떤 사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평경장에 의해 이쪽 길로 들었고 고니를 사이에 두고 힘겨루기를 하다가 결국 평경장을 죽이고 만다. 한국영화에 팜므파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가히 최고라 할 만큼 캐릭터가 세고 입체적이다. 지상 최대의 목표는 돈이고 돈을 위해 사기도박을 설계한다.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던 여자였는데 어쩌다 고니에게 마음을 주고 만다. 그 때부터 인생이 괴로워진다.
아귀 "복수 같은 그런 순수한 인간적인 감정으로다 접근하면 안 되지. 도끼로 마빡을 찍듯 식칼로 배를 쑤시든, 고기 값을 번다. 뭐 이런 자본주의적인 개념으로다가 나가야지." 고니의 가장 큰 적이다. 영화의 잔상으로 볼 때, 김윤석이 불과 7씬에 출연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렬하다. 철저하게 돈의 논리로 패를 읽고 상대를 읽는다. 이 독심술은 결코 틀린 법이 없었지만, 고니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쇠망치에 손이 날아가는 순간에도 왜 고니가 정마담에게 자기보다 낮은 패를 줬는지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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