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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도보기행] <14> 보부상의 길, 십이령을 넘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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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트레일 53구간, 소광리에서 두천리까지

[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보부상의 길, 십이령을 넘다①편에서 이어집니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옛 학교터에서 화전민의 길로

전날 저녁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밤사이 하늘이 개었다. 십이령을 걷는 이틀째 아침이다. 하룻밤을 묵은 금강송펜션 앞마당 끝자락에 비석 두 기가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소광국민학교 교적비다. 1947년 문을 열어 47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5년 문을 닫은 학교의 자취가 남아 있다. 한때 이 깊은 산골에도 학교가 있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마당에서 뛰놀았을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금강송팬션앞 교적비와 선정비. [사진=박성기 작가]

금강송펜션은 동서트레일 52구간이 끝나고 53구간이 시작되는 자리다. 이곳에서 53구간의 종점인 두천1리 내성행상불망비까지는 약 13.4km다. 금강소나무숲길 1구간인 보부상길과도 겹친다. 이 길을 그대로 따르면 십이령 옛길을 걷게 되지만, 오늘은 금강소나무숲길 3-1구간인 화전민 옛길을 돌아보기로 한다. 걸을 거리는 4km가량 더 늘어날 듯하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길옆 꿀벌통 [사진=박성기 작가]

1km 남짓 걷다가 동서트레일 53구간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접어든다. 벼랑 아래로 통나무 벌통 여러 개가 놓여 있다. 밤나무 아래에는 떨어진 밤송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비탈에 핀 코스모스는 바람에 고개를 숙인다. 시멘트 임도를 지나 본격적인 숲길로 들어선다. 개울물이 넘쳐 길 위로 얕게 흐른다. 돌을 디뎌 몇 차례 물길을 건넌다. 숲에는 간벌한 통나무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고 그 위로 이끼가 두껍게 자랐다.

키 작은 잡목 사이로 이어지던 길이 금강송 숲으로 들어선다. 붉은 줄기의 소나무들이 빽빽하다.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은 거북 등처럼 갈라졌고, 그 사이로 굴참나무 몇 그루가 두툼한 수피에 깊은 골을 드러낸다. 골짜기가 깊어지자 휴대전화가 통화권을 벗어난다. 세상 소식과도 멀어진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금강소나무(황장목) [사진=박성기 작가]

병정소나무에 남은 상처

금강소나무 군락을 벗어나면 일본잎갈나무 숲이 나타난다. 흔히 낙엽송이라 부르는 나무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들 사이에는 이미 쓰러져 낙엽에 덮인 것들도 있다. 길에는 우리 일행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발밑에서 낙엽이 바스락거리고 간간이 계곡물 소리가 들려온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병정소나무. [사진=박성기 작가]

길을 이어가다 병정소나무 앞에 선다. 특이한 이름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일제강점기 말기, 석유를 대신할 원료를 얻으려고 소나무에 V자 모양의 홈을 파고 송진을 채취했다. 깊은 상처를 입은 아름드리 금강송 여섯 그루가 병정들처럼 한 줄로 늘어서 있다 하여 병정소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1970년대에도 마을 사람들이 공업용 원료로 쓰일 송진을 채취했다고 하니 금강송들의 수난은 해방 후에도 이어진 셈이다.

껍질은 상처 가장자리를 따라 아물었지만 깊게 파인 흔적은 선명하다. 드러난 나뭇결에는 비스듬히 칼을 댄 자국이 촘촘하게 남아 있다. 주변의 아름드리 소나무에도 비슷한 상처가 보인다. 세월이 흘렀어도 나무는 그 흔적을 지우지 못했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작은빛내 화전민터. 옆으로 소광천(작은빛내)가 흐른다. [사진=박성기 작가]

부채살처럼 가지를 뻗은 커다란 소나무를 지나 임도로 내려선다. 화전민 마을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나타난다. '작은 빛내'라 불리던 마을이다. 네댓 가구가 산비탈을 일구며 살던 터전으로, 1990년대까지 사람이 살았다고 전한다. 지금은 무너진 돌담과 집터를 풀과 나무가 덮고 있어 집이 있던 자리를 쉽게 알아보기 어렵다.

소광천에 닿는다. 물은 돌 사이로 흐르고 골짜기 옆으로 차도가 이어진다. 물가의 단풍나무는 가지 끝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너삼밭재와 저진터재를 찾아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너삼밭재. [사진=박성기 작가]

금강소나무숲길 안내소를 지나 조금 내려가니 너삼밭이다. 개울에는 넓적한 징검돌이 놓여 있다. 금강소나무숲길 1구간인 보부상길은 소광2리에서 저진터재와 너삼밭재를 지나 샛재와 바릿재를 넘어 두천1리로 이어진다. 화전민 옛길을 돌아 이곳 너삼밭으로 내려왔으므로 지나친 두 고개를 찾아가 보기로 한다. 소광리 방향으로 길을 거슬러 오른다.

차도를 잠시 걷다가 오른쪽 산길로 접어든다. 양쪽 흙벽 사이로 길이 깊게 파여 있다. 나무뿌리가 드러난 비탈에 통나무 계단이 놓여 있다. 계단을 따라 오르니 너삼밭재다. 예전에는 푯말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너삼은 고삼이라고도 부르는 약초다. 이 풀이 많이 자라던 곳이라 하여 너삼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저진터재. [사진=박성기 작가]

고개를 내려 저진터재로 향한다. 땅이 늘 젖어 있는 터라는 뜻에서 비롯한 이름으로 전해진다. 저진터재를 둘러본 뒤 왔던 길을 되짚어 두천리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금강소나무숲길 안내소에서 징검다리를 건너 소광천을 따라 걷는다. 대광천 산림초소에 이르니 숲속에 작은 통나무 건물이 들어서 있고 앞에는 나무 의자가 놓여 있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징검다리를 건너 샛재로 향한다. [사진=박성기 작가]

숲길을 이어가는데 허기가 지기 시작한다. 마침 길가에 쉬어 갈 만한 자리가 나타난다. 배낭을 내려놓고 펜션에서 준비한 점심을 먹는다. 십여 미터 앞에는 이정표가 서 있다. 삼거리다. 오른쪽 길은 대왕소나무로 이어진다. 그 소나무가 고사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는다.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어 샛재로 향한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샛재 가기전 주막이 있던 자리. 바위위에 비가 있다. [사진=박성기 작가]

한동안 숲길을 걸어 주막터에 닿는다. 주막은 사라지고 터는 풀에 덮였다. 이정표에 남은 이름만이 이곳에 주막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길가의 이끼 덮인 바위 위에 작은 돌비 하나가 세워져 있다. 이 깊은 산속에도 고개를 넘는 길손을 맞던 주막이 있었다. 일행도 잠시 자리를 잡고 주막의 옛 모습을 그려본다. 누군가는 짐을 내려놓고 땀을 식혔을 것이고 누군가는 먼저 떠난 일행을 기다렸으리라.

샛재, 선질꾼들의 기도가 머문 곳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조령성황당. [사진=박성기 작가]

주막터를 지나며 오르막이 가팔라진다. 흙길에 돌이 박혀 있고 계단의 높낮이도 일정하지 않다. 머리칼 사이로 흐른 땀이 이마를 적신다. 몇 번이나 눈가를 훔치며 오른다. 오르막 끝에 기와지붕을 얹은 작은 사당이 나타난다. 조령성황사(鳥嶺城隍祠)다.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본다. 벽마다 글씨가 빼곡한 현판들이 걸려 있다. 제단에는 촛대와 놋그릇, 향로 등이 놓여 있다. 현판에는 사당을 고쳐 지은 내력과 관련 인물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조령성황사는 십이령을 넘나들던 보부상과 선질꾼(짐을 진 채 지게작대기에 기대어 선 채로 쉬었다 하여 붙은 이름)들이 성황신에게 무사한 통행을 빌던 곳이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샛재. [사진=박성기 작가]

당시 십이령은 지금처럼 정비된 숲길이 아니었다. 가파른 산비탈과 깊은 골짜기를 지나고 산적을 만날 위험도 있었다. 등짐에 실린 물건을 빼앗기면 생계가 막막해졌고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무슨 마음으로 이곳에 섰을까. 짊어진 짐의 무게만큼이나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도 무거웠을 것이다. 나도 걸음을 멈추고 두 손을 모은다.

사당을 지나 조금 더 오르니 굵은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언제나 샛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라는 설명이 붙은 샛재송이다. 샛재(鳥嶺)를 넘는다. 낡은 나무 이정표에 두천 7.6km, 소광 5.9km라 적혀 있다. 샛재는 새재라고도 불린다. 새도 넘기 힘들어 쉬어 간다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정확한 유래는 분명하지 않다. 짐을 지고 넘던 선질꾼들에게는 눈물 고개라 불릴 만큼 힘겨운 길이었다.

고개에 서니 골짜기에서 바람이 불어 올라온다. 땀에 젖은 등줄기가 서늘하다. 이쯤에서 소리 잘하는 선질꾼이 앞장서 노래를 메겼을 법하다. 뒤따르던 이들이 그 소리를 받아 부르며 고단함을 달랬으리라.

찬물내기, 바위에 남은 지게작대기 자국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두천리서 오면 샛재를 넘기전 가파르게 오르다 저렇게 선질꾼들이 지게를 괴는 홈이다. 수많은 시간 지게를 괴다보니 저렇게 홈이 파였다. [사진=박성기 작가]

샛재를 내려서는 길은 가파르다. 골짜기를 따라 좁은 산길이 굽이친다. 흙이 씻겨 나간 비탈에는 나무뿌리가 굵게 드러나 있다. 가파른 비탈길을 지나다 보니 길가에 작은 홈이 파인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바지게(싸리로 엮은 발채를 얹은 지게)를 진 바지게꾼들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지는 일이 힘에 부쳐 지게작대기로 짐을 받친 채 쉬었다고 한다. 이곳을 오가던 선질꾼들이 작대기 끝으로 바위를 짚으며 남긴 흔적이라는 것이다.

깊지 않은 홈이지만 발길을 붙잡는다. 수없이 같은 자리에 지게작대기를 짚었기에 돌에도 이런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바위에 패인 작은 홈이 그들이 짊어졌던 짐의 무게를 짐작하게 한다.

산길은 계곡을 따라 내려간다. 숲을 빠져나오니 찬물내기 쉼터다. 찬물이 솟는 샘터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힘겹게 고개를 넘은 선질꾼들도 이곳에서 물을 마시며 숨을 골랐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약수보다 반가운 물이었으리라.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찬물내기 쉼터. [사진=박성기 작가]

찬물내기부터는 임도다. 철망 울타리에 동서트레일 53구간 안내판이 걸려 있다. 잠깐 차도를 걷다가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길은 골짜기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다. 계곡물은 넓은 암반 사이에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바닥의 돌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맑다. 흰 바위에는 물이 오랜 세월 흘러 만든 둥근 홈과 줄무늬가 남아 있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합수나달. 시시골과 찬물내기골의 계곡 물줄기가 만나는 좁은 나들목. [사진=박성기 작가]

다른 계곡에서 흘러온 물길이 만나는 합수나들을 지난다. 낡은 안내판에 산양 그림과 입에 손가락을 댄 사람의 그림이 나란히 있다. 조용히 지나가라는 뜻이다. 이 일대는 천연기념물인 산양의 주요 서식지다.

장평 주막터에서 바릿재까지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장평마을의 장평성황당. [사진=박성기 작가]

장평(長坪)에 이른다. 길게 펼쳐진 들이라는 뜻이다. 이곳에도 주막터가 남아 있다. 주막은 산길을 오가던 사람들이 쉬고 묵으며 장터 소식을 주고받던 곳이었다. 봉놋방은 여러 나그네가 함께 묵는 주막의 큰 방이다. 장사꾼들이 한데 모여 어느 장에 물건값이 좋은지, 어느 고개가 험한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품삯을 받고 짐을 나르던 선질꾼들의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다. 쌀을 조금씩 지니고 다니며 직접 밥을 지어 먹었다고 한다. 변변한 반찬 없이 소금으로 간한 밥으로 끼니를 때우는 날도 있었으리라. 지금은 주막도 장꾼도 보이지 않는다. 숲으로 둘러싸인 길가에 터만 남아 있다. 이곳을 오가던 사람들이 주고받았을 말소리와 발걸음은 오래전에 끊겼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바릿재. [사진=박성기 작가]

장평을 지나니 이정표가 바릿재 0.6km를 가리킨다. 다시 오르막이다. 길바닥에는 마른 솔잎과 낙엽이 깔려 있다. 바릿재는 소나 말의 등에 싣는 짐을 뜻하는 '바리'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전한다. 소에 물건을 바리바리 싣고 넘나들었다는 것이다.

이 길은 소장수들도 이용했다. 영주와 봉화의 소장수들은 울진에서 소를 사서 내륙으로 몰고 갔다고 한다. 큰 소들은 앞서 가는 소를 따라 걸었고 송아지들은 여러 마리를 줄로 묶어 끌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람이 짊어진 바지게뿐 아니라 물건을 실은 소와 말도 이 고개를 넘었다. 험한 산길을 따라 짐승을 몰고 가는 일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르막이 끝날 무렵 나무 사이로 하늘이 넓어진다. 바릿재에 오른다. 고갯마루 너머로 소나무 능선이 겹겹이 이어진다.

내성행상불망비, 잊지 않겠다는 약속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바릿재를 지나면 이렇게 금강송이 펼쳐진다. [사진=박성기 작가]

바릿재를 넘어서니 소나무 숲길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비탈을 돌아 내려간다. 길은 높은 흙벽 사이로 깊이 들어앉아 있다. 오랜 세월 사람과 짐승이 오가며 팬 길처럼 보인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효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40여 분쯤 내려가니 길가에 심천범의 효행을 기리는 안내비가 있다. 비문에는 심천범 내외의 효심에 얽힌 이야기가 적혀 있다. 조금 아래 숲속에는 붉게 칠한 작은 비각이 돌담을 두르고 들어앉았다. 지붕 박공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산기슭으로 내려서자 계곡이 넓어진다. 길 오른쪽에는 벼랑이 우뚝 솟아 있다. 벼랑 아래로 물이 흐르고 그 너머로 마을 지붕이 보인다. 징검돌을 따라 개울을 건넌다. 물이 얕아 바닥의 자갈이 드러나고 너른 웅덩이에는 맞은편 산자락이 비친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내성행상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계곡 입구에 붉은 기둥과 푸른 단청을 입힌 비각 하나가 있다. 돌기단 위에 기와지붕을 얹었고 창살 너머로 철비 두 기가 나란히 보인다. 내성행상불망비(乃城行商不忘碑)다. 선질꾼비라고도 부른다. 한 기는 '내성행상반수권재만불망비(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 다른 한 기는 '내성행상접장정한조불망비(乃城行商接長鄭漢祚不忘碑)'다.

19세기 말, 울진과 봉화의 장터를 오가던 상인들이 반수 권재만과 접장 정한조의 은공을 기려 세운 비다. 두 사람은 상인들을 이끌고 상거래를 도우며 여러 어려움을 돌보았다고 전한다. 상인들이 돈을 모아 오래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돌 대신 쇠로 비를 만들었다고 한다.

비석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그 뒤에는 험한 고갯길을 함께 넘던 수많은 선질꾼의 삶이 있다. 돌보다 오래 남을 쇠에 이름을 새긴 것은 그만큼 고마움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각 뒤로 '보부상길 출발지점'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두천리에서 산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에게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소광리에서 고개를 거슬러 걸어온 내게는 이틀간의 여정이 끝나는 자리다. 열두 고개를 다 넘은 것은 아니다. 흥부장 쪽으로는 쇠치재와 세고개재가 있고 죽변 쪽에는 돌재와 나그네재가 있다. 그 고개들은 다음 걸음으로 남겨 둔다.

두천리 주막거리, 길은 끝나지 않았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두천리 주막거리. 새롭게 복원했다. [사진=박성기 작가]

개울을 건너 두천1리 주막거리로 들어선다. 울진장과 죽변장, 흥부장에서 온 상인들이 모여 열두 고개를 넘을 채비를 하던 곳이다. 주막과 마방이 들어서 길손을 맞았다. 상인들은 여기서 일행을 기다리고 다음 날 넘을 고개와 장터 사정을 의논했을 것이다. 날이 저물면 탁배기 한 잔으로 피로를 풀고 봉놋방에 몸을 눕혔으리라.

지금은 옛 주막거리를 재현한 초가지붕의 집들이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짐 실은 소를 끄는 사내와 보따리를 인 아낙, 지게를 진 장꾼들의 조형물이 줄지어 서 있다.

두천1리 장수봉 선생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람들이 흔히 보부상길이라 부르지만, 정작 가장 고단했던 사람들은 선질꾼이지요." 장 선생은 품삯을 받고 무거운 짐을 날라야 했던 선질꾼들의 고단한 삶을 이야기했다. 그 말을 하던 장수봉 선생이 선질꾼의 노래 한 대목을 불렀다.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 고개를 언제 가노/꼬불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노래를 마친 선생은 선질꾼의 모습이 서럽다고 한다. 장터를 오가는 상인들과 달리 그들은 남의 물건을 짊어지고 험한 고개를 넘었다. 물건을 팔아 이문을 남기는 장사꾼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으로 품삯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두천리 주막거리에서 배낭을 내려놓는다. 옛 선질꾼들은 이곳에서 짐을 벗었어도 장날이 돌아오면 다시 바지게를 졌을 것이다. 고개를 넘어 장터에 갔다가 같은 길을 되짚어 돌아와야 했다. 내게는 이틀의 여정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오가야 했던 고단한 길이었다.

이 12령길이 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의 주무대다. 책장을 넘기며 그려보았던 장터와 고갯길이 눈앞의 풍경으로 펼쳐지고, 소설 속 사람들의 삶이 내가 디딘 발걸음마다 겹쳐진다. 글로 읽었던 고단한 삶의 무게가 비로소 발끝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책 속에서 시작된 길은 십이령의 고갯마루를 넘어 두천리에서 멈춘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발자취는 내 안에서 또 하나의 길이 되어 오래도록 이어질 것이다.

두천천에 비친 기암절경과 내성행성불망비 정자각. [사진=박성기 작가]
박성기 여행가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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