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도히 세평길을 흐르는 낙동강 [사진=박성기 작가 ]](https://image.inews24.com/v1/975f04b9c52f5f.jpg)
[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양원역에서 내리다
첫 기차는 낙동강(洛東江)을 거슬러 올라 양원역(兩院驛)에서 나를 내려놓는다. 산과 산 사이, 강 곁에 겨우 자리를 잡은 역이다. 한 칸짜리 하얀 슬레이트 대합실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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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떠나자 역은 금세 고요해진다. 영화 '기적'의 배경이 된 양원역 일대는 오랫동안 철길밖에 의지할 곳이 없던 오지다. 강 서쪽 봉화군 분천리의 원곡마을과 강 동쪽 울진군 전곡리의 원곡마을 주민들이 대통령에게 청원하여 만들어낸 역이다. 역 이름은 두 원곡이라는 뜻의 양원이다. 이곳 사람들에게 기차는 장에 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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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걷는 길은 동서트레일 51구간이다. 양원역의 조그마한 역이름 표지판에는 왼쪽 승부(承富), 오른쪽 분천(汾川)이 적혀 있다. 원래는 분천역에서 시작해 양원역에서 끝나지만, 나는 거꾸로 양원에서 출발한다. 양원역에서 승부역까지는 낙동강 세평하늘길의 한 부분이고, 승부역을 지나 배바위고개를 넘어 비동(肥洞)마을과 분천으로 이어지는 길은 낙동정맥트레일과 겹친다. 하나의 길에 여러 이름이 포개져 있다. 새로 낸 길이 아니라 주민들이 오가던 생활길과 산판길(벌목길)을 오늘의 트레일로 다시 이어놓은 셈이다.
강과 철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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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역을 벗어나 낙동강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강과 철길과 걷는 길이 좁은 협곡으로 나란히 이어진다. 산이 워낙 깊어 셋이 서로 멀어질 틈도 없다. 강이 굽으면 길도 굽고 철길도 산허리를 돌아간다. 터널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철교가 강을 건너간다. 때로는 절벽에 덧댄 데크길이 이어진다. 기차는 산을 뚫고, 사람은 절벽에 길을 매달아 이 골짜기를 지나간다. 승부역까지의 길에는 낙동강 비경길이란 이름이 붙었다.
낙동강이라고 하면 넓은 강이 떠오르지만 아직은 강이 몸집을 키우기 전이다. 좁은 곳에서 거칠게 흐르다가 깊은 웅덩이를 만나면 숨을 고른다. 바위는 오랜 세월 강물에 깎여 매끄럽다. 신선이 드나든다는 선문(仙門)을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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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산이 좁혀지며 골짜기가 깊어진다. 그 안쪽에 나란히 솟은 연인봉(戀人峰)과 맑은 물이 흐르는 선약소(仙藥沼)를 지난다. 흘러내린 강물이 선약소에 들어서서 천천히 원을 그린다. 강 가운데 구암(龜巖)이 머리를 들고 서 있는데 멀리서 보아도 딱 거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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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 철길로 백두대간 협곡열차가 지나간다. 빨간 객차가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금방 터널로 들어간다. 열차가 사라지자 물소리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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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금마을을 지난다. 이 깊은 골짜기에 사람이 산다. 지난해에야 전기가 들어왔다고 한다. 철길 낙석 감시초소의 예비 전력에서 한 집 쓸 만큼을 나눠 받는다.
물결을 바라본다는 관란담(觀瀾潭)이다. 강물이 넓은 바위와 깊은 소를 만나 속도를 늦추고, 건너편 숲은 수면 위에 비쳐 떠 있다. 분명 흐르는 물인데 보고 있으면 멈춘 것처럼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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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병대(隱屛臺)에 이르자 숨어있던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강물은 그 발치를 치며 흐른다.
승부역
승부역에 닿는다. 아담한 역사가 골짜기 깊숙이 들어앉아 있다. 사방을 산이 둘러싸 하늘이 좁다. 옛 역무원이 바위에 새긴 글귀가 있다. 하늘도 세 평이요, 꽃밭도 세 평이라. 이보다 더한 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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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떠나고 없는 역에는 물소리와 바람 소리만 남는다. 한때 이곳은 기차가 멈춰 설 때면 마을 사람들이 보따리를 들고나와 순식간에 번개장터를 이루었다. 기적 소리와 함께 열렸다가 기차가 떠나면 사라지던 장터였다. 지금은 마을 주민이 차린 작은 가게가 걷는 사람을 맞는다. 좌판에는 산에서 거둔 나물이 놓여 있다.
강을 따라 걷던 낙동강 비경길은 여기서 끝나고, 이제부터는 고개를 넘어야 한다. 역 한쪽에 앉는다. 간단한 요기를 하고 다리를 주무른다.
산판길(벌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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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배낭끈을 졸라매고 승부역을 벗어나 비동마을로 가는 배바위 고개로 향한다. 산 입구에 동서트레일 51구간 표지가 보인다. 숲에는 호랑이 조형물이 서 있고 오래된 나무와 작은 계곡이 이어진다. 강물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숲의 소리가 가까워진다. 산길에 접어들자 커다란 돌들이 비탈에 널려 있고 나무뿌리가 그 돌을 움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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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가지 않아 산판길 안내판을 만난다. 벌채가 활발하던 시절 베어낸 춘양목(春陽木)을 산 아래로 내리던 길이다. 한때는 목재를 실은 차량이 오르내렸다. 지금은 그 길을 사람이 걷는다.
쓰러진 나무에는 부채처럼 생긴 버섯이 층층이 붙고, 바위에는 두꺼운 이끼가 내려앉는다. 돌 틈마다 고사리와 작은 풀들이 자란다. 숲이 볕을 가려 저녁처럼 어둡다. 습하고 깊어서 땀이 등을 타고 흐른다. 보라색 투구꽃은 지나는 길목 곳곳에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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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바위고개
작은 계곡을 여러 차례 건너며 올라간다. 숲속에는 철제 다리와 판자 다리가 놓여 있다. 물은 적지만 돌 사이로 끊임없이 흘러 나간다. 이정표에는 배바위고개와 승부역까지의 거리가 적혀 있다. 숫자를 확인할 때마다 고갯마루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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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한쪽에 돌무더기와 샘터가 있다. 옛날 이곳에 화전민들이 터를 일구었고, 뽕나무가 많아 뽕나무골이라 불렸다 한다. 사시사철 물이 나던 샘터를 중심으로 집들이 모여 있었다. 1975년 화전 정리로 사람들은 산을 떠났다. 지금은 집 한 채 보이지 않지만 돌을 쌓은 흔적과 평평한 집터가 남아 있다.
오르막 끝에 배바위고개(808m)가 있다. 해발 968m 배바위산의 허리춤이지만, 해발 400m 남짓한 승부역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터라 숨이 가쁘다. 잠시 벤치에 앉는다.
고개에는 사람보다 오래된 이야기가 산다. 산은 사람의 혼을 홀리는 도깨비 이야기며, 오랜 옛날 물이 산꼭대기까지 차서 배를 댔다는 배바위의 전설을 품고 있다.
고갯마루를 바람이 지나간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승부를 뒤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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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시길
고개를 넘어서니 내리막이다. 산허리를 따라 좁은 오솔길이 이어지고 한쪽에는 안전줄이 설치되어 있다. 고개 넘어 초입 길은 가팔라서 발밑은 승부 쪽에서 오르는 길보다 힘들지만 조금 더 내려서면 길이 부드러워진다. 낙엽이 깔린 길을 따라 내려가니 '소장시길' 안내판이 서 있다.
소장수들이 소를 끌고 가까이는 춘양장, 멀리는 내성장(乃城場)으로 넘어가던 길이다. 때로는 소 수십 마리가 줄을 지었고, 길이 멀면 산속에서 소에게 풀을 뜯기며 쉬어 갔을 것이다. 지금은 숲길이 되었지만, 한때는 누군가의 생계가 걸린 길이었다.
비동에서 분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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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조금씩 옅어지면서 비동마을로 내려선다. 산에서 보지 못한 색이 길가에 피어 있다.
작은 폭포를 지난다. 바위틈에서 흘러내린 물이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가 다시 한곳으로 모인다. 길가에는 커다란 만지송이 서 있다. 한 몸에서 소나무 줄기가 수십 가닥 갈라져 위로 뻗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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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에서 담배꽃을 만난다. 커다란 담뱃잎 위로 올라온 긴 꽃대 끝에 연분홍빛 꽃이 달려 있다. 담배는 말린 잎으로만 알았는데 꽃은 뜻밖에 곱다. 가느다란 나팔 모양의 꽃이 끝에서 살며시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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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동을 지나면 분천까지 4km의 긴 포장길이다. 승부역에서 헤어졌던 강과 철길을 다시 만나 분천역까지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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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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