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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기의 도보기행] <11>코카서스를 걷다, 조지아를 만나다 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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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소 계곡 트레킹

[조이뉴스24 이미영 기자] <11>코카서스를 걷다, 조지아를 만나다 ⑰ 편에서 이어집니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협곡을 지나 고원으로

코비(Kobi)는 트루소(Truso) 계곡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카즈베기와 구다우리 사이, 군사도로 곁에 자리한 산촌이다. 군사도로를 벗어나자 산자락 깊숙이 파고드는 비포장길이 시작된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카사리 협곡으로 들어서기 전의 제모 오크로카나의 작은 교회와 돌탑. [사진=박성기 작가]

크베모 오크로카나(Kvemo Okrokana)와 제모 오크로카나(Zemo Okrokana)를 지난다. 조지아어로 '크베모'는 아래, '제모'는 위를 뜻한다. 돌집과 허물어진 담, 작은 교회와 돌탑을 벗어나 카사리(Kasari) 협곡으로 들어선다. 산자락 굽이를 돌 때마다 눈 쌓인 코카서스의 산봉우리가 나타났다가 숨길 반복한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카사리 협곡의 모습. [사진=박성기 작가]

협곡이 끝나자 막혀 있던 시야가 한꺼번에 열린다. 멀리 있던 설산이 성큼 앞으로 다가선다.

차에서 내리자 트래버틴(Travertine, 석회화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는 마치 빙하가 산비탈을 타고 흘러내린 듯하다. 가까이 가면 다르다. 땅속에서 솟은 광천수가 오랜 세월 광물질을 내려놓아 만든 지형이다. 붉고 주황빛을 띤 지면에는 흰 석회질 침전물이 물기에 젖어 반짝인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철교 건너기 전, 왼쪽 하얀 부분이 트래버틴 지형이다. [사진=박성기 작가]

아래로 내려서자 테르기(Tergi)강을 가로지르는 작은 철다리가 나타난다. 발을 디딜 때마다 다리는 조금씩 출렁이고 쇳소리가 난다. 다리를 건너자 '트루소 캠핑 & 카페(Truso Camping & Cafe)'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무와 풀숲 사이로 걷는 이들이 쉬어 갈 의자 몇 개가 있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철교를 건너 카페와 그 위로 걷는 길이 보인다. [사진=박성기 작가]

강을 거슬러 걷다

카페 뒤로 난 나무 계단을 오른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걷는다. 강은 내가 가야 할 저 먼 상류에서 유유하게 흘러내린다. 나는 그 물길을 거슬러 오른쪽 산비탈을 따라가는 길로 들어선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산기슭을 따라 테르깅 강을 거슬러 올랐다. [사진=박성기 작가]

산과 산 사이에는 드넓은 초원이 길게 누워 있다. 그 가운데로 테르기강이 여러 번 몸을 굽힌다. 강은 한 줄기로만 흐르지 않는다. 작은 물길로 갈라졌다가 다시 만나고 습지를 끼고 돌아 나간다.

길은 강보다 조금 높은 비탈을 따라 이어진다. 오른쪽으로는 풀로 덮인 산등성이가 가파르게 솟고, 왼쪽 아래로는 강과 초원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바람이 정면에서 불어온다. 햇볕은 강한데 기온은 선선하다. 풀 밟는 소리 너머로 강물 흐르는 소리가 어렴풋하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트루소 벨리의 꽃들. [사진=박성기 작가]

노란 꽃이 넓게 번지고 그 사이로 보랏빛과 흰 꽃이 섞인다. 길가부터 습지와 산비탈까지 들꽃이 이어진다. 꽃을 밟지 않으려 발을 옮기다 보니 자꾸 걸음이 느려진다. 무릎을 굽혀 한 송이를 들여다보고, 다시 몇 걸음 걷다가 다른 꽃 앞에 멈춘다.

멀리 사람들이 초원을 가로질러 간다. 사람이 작아질수록 계곡은 더 커 보인다. 강가에는 소 떼가 풀을 뜯는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테르기 강 너머로 보이는 산. [사진=박성기 작가]

땅에서 솟는 광천수

강 쪽으로 내려서면 길 위의 풀이 바람에 고개를 숙인다. 산에서 흘러내린 작은 물줄기들이 길을 가로지른다.

강과 습지만 보이던 땅에서 물이 솟는다. 아바노 광천 호수(Abano Mineral Lake)다. 풀밭에 돌로 둘러 놓은 호수라기보다는 큰 웅덩이에 가깝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멀리 사람들이 아바노 광천호수로 내려가고 있다. 그 뒤로 펼쳐진 테르기강 [사진=박성기 작가]

다가서니 바닥에서 기포가 쉴 새 없이 올라온다. 끓는 것처럼 보글거리지만 뜨겁지는 않다. 웅덩이 둘레에는 붉은빛과 주황빛이다. 물에 섞여 나온 철분과 광물질이 오랜 세월 쌓이며 흙과 돌을 물들였다. 맑은 물 아래 바닥까지 같은 색이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아바노 광천 호수. [사진=박성기 작가]

손으로 물을 떠 한 모금 마신다. 약한 탄산이 혀끝을 건드린다. 처음에는 조금 달짝지근하다가 끝에 희미한 쇠 맛이 남는다.

길을 걷다 보면 광천수를 뿜어내는 작은 웅덩이들을 계속 만난다. 풀밭 여기저기에서 물이 솟고, 그 둘레로 붉고 누런 퇴적층이 넓게 깔려 있다. 광천수가 남긴 자국이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길을 걷는 사람들. [사진=박성기 작가]

텅 빈 마을 케트리시

언덕 하나를 넘자 다시 평원이 열린다. 그 끝에 잿빛 덩어리들이 보인다. 가까이 갈수록 벽이 되고 집이 된다. 케트리시(Ketrisi)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케트리시마을과 휘돌아 가는 테르기강. [사진=박성기 작가]

마을 앞 초원에는 소들뿐, 사람의 기척은 거의 없다. 지붕이 내려앉은 집과 벽만 남은 집들이 풀밭 사이에 흩어져 있다. 창문은 검게 뚫려 있다. 방 안까지 풀이 들어와 있고 무너진 돌담 사이에서는 들꽃이 핀다.

언덕 위에는 돌탑 하나가 서 있다. 군데군데 허물어졌지만 여전히 계곡을 바라본다.

이 일대에는 오세트계 주민들이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혹독한 자연환경과 열악한 생활 여건으로 주민들이 북오세티야 등지로 떠나기 시작했고, 1990년대의 분쟁을 거치면서 이주는 더 늘어났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길을 걷다 건너 광천수를 뽑아올리는 것을 보다. 케트리시. [사진=박성기 작가]

빈 창문으로 바람이 드나들고 사람이 다니던 길에는 풀이 자란다. 돌담 앞에 선다. 폐허라고 부르기에는 남아 있는 삶의 흔적이 너무 선명하다.

강가로 내려가면 소들이 얕은 물에 들어가 몸을 식힌다. 사람의 길과 소의 길이 따로 없다.

수도원을 지나 아바노 마을로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12사도수도원. [사진=박성기 작가]

케트리시를 내려다보며 길을 잇는다. 길가에 돌기둥이 서 있고 철문은 닫혀 있다. 쇠를 두드려 만든 포도잎과 덩굴이 문살을 감는다. 둥근 테 안에는 십자가가 들어 있다. 12사도 수도원(St. 12 Apostles Fathers Monastery)이다. 산자락 아래 교회와 낮은 종탑이 있다. 비탈 위에는 돌집 하나가 따로 앉아 있다. 문 앞에서 잠시 수도원을 바라본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아바노마을. [사진=박성기 작가]

길은 아바노 마을로 이어진다. 아바노는 조지아어로 '목욕탕'을 뜻한다. 광천이 솟는 땅에서 생긴 이름이다.

들판에 돌로 쌓은 작은 교회가 있다. 아바노 수녀원의 교회다. 회색 돌과 붉은 돌이 섞인 벽에 좁은 창 하나가 나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올라앉았다. 아치 아래 나무문이 반쯤 열려 있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아바노 수녀원 교회. [사진=박성기 작가]

문턱에 서서 안을 들여다본다. 어둡다. 교회 앞에는 돌 십자가가, 그 곁에는 붉게 삭은 쇠 십자가 둘이 풀 속에 서 있다. 나무틀에 매단 작은 종 뒤로 노란 꽃이 깔려 있다.

마을 길가의 붉은 지붕은 수녀들이 꾸리는 식당이다. 점심은 자카고리 요새를 다녀온 뒤로 미룬다.

길의 끝, 자카고리 요새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자카고리 요새. [사진=박성기 작가]

아바노를 지나자 멀리 언덕 위에 자카고리(Zakagori) 요새가 돌무더기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가까워질수록 요새의 탑과 무너진 성벽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한참 평지를 따라가다 요새를 향해 비탈을 오른다. 사람 한 명이 지날 만한 오솔길이 요새까지 이어진다. 흙과 잔돌이 섞인 길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뒤로 밀린다. 몇 번은 손으로 바위를 짚는다.

숨을 고르며 올려다보니 푸른 하늘 아래 적갈색 돌벽이 서 있다. 요새 안으로 들어선다. 지붕은 없다. 사각형 구멍으로 맞은편 초록 산등성이가 액자 안 그림처럼 들어온다. 돌마다 크기와 색이 다르다. 비바람을 맞은 돌에는 주황빛 지의류가 붙어 있다.

요새 가장 높은 곳에는 돌탑이 서 있다. 다른 건물은 대부분 허물어졌는데 탑만 높이를 지킨다. 밑에서 보면 곧게 선 돌기둥 같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멀리 자카고리 요새와 검문소. [사진=박성기 작가]

테르기강을 따라 계곡을 드나드는 사람과 물자의 움직임을 살피기에 더없이 좋은 자리다. 탑 아래에서 몸을 돌려 바라보니 내가 걸어온 길이 한눈에 펼쳐진다. 산비탈을 따라 걸었던 오솔길은 가느다란 선이 되어 초원 속으로 스며든다. 걷는 동안에는 거의 평지인 줄 알았다. 내려다보니 물길과 습지를 지나고 언덕을 여럿 넘어온 길이다.

반대편을 바라본다. 요새 뒤 산등성이에는 조지아 경비초소가 보인다. 남오세티야와의 사실상 경계선이 가까운 지역이다. 일반 여행자가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길은 여기까지다.

길은 끝나지만 강은 그 너머에서 흘러온다.

수녀들이 차린 한 끼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아바노 수녀들이 운영하는 식당. [사진=박성기 작가]

요새를 내려와 아바노로 되돌아온다. 오후 2시다. 네 시간을 걸었다.

붉은 지붕 식당 앞에 선다. 통나무 기둥 둘이 나무 발코니를 받치고, 문 위에는 종 하나가 달려 있다. 벽에는 조지아 국기가 걸려 있고, 무늬를 새긴 긴 나무 의자 위에 성화 몇 점이 기대어 있다.

검은 수도복에 앞치마를 두른 수녀 둘이 식탁 앞에 서서 점심을 차린다. 접시에 치즈를 넣은 빵 한 조각과 구운 고기 한 덩이가 놓인다. 고기 위에는 붉은 양념이 얹혀 있다. 오렌지 주스 한 잔도 나온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음식을 준비하는 수녀님 [사진=박성기 작가]

이 식당에는 메뉴판이 없다. 수녀들이 그날 만든 것이 식탁에 오른다. 모자라면 더 청하면 된다. 값도 정해져 있지 않다. 먹은 사람이 알아서 두고 가면 그만이다.

늦은 점심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다. 다시 바람이 분다. 차에 올라 트빌리시로 향한다. 창밖으로 아바노의 붉은 지붕이 멀어지고 요새의 탑이 작아진다.

강은 여전히 고원을 흐른다.

길을 돌아보다

조지아를 걷고 기록한 이야기가 이번 트루소 계곡으로 마지막 열여덟 번째에 이른다. 트빌리시의 골목에서 시작해 므츠헤타와 고리, 쿠타이시를 지나 스바네티의 산으로 들어갔다. 메스티아와 우쉬굴리를 걷고 쉬카라 빙하 앞에 섰다. 그리고 조지아 군사도로를 따라 카즈베기로 들어와 게르게티와 주타를 걸었다. 마지막으로 트루소 계곡 깊숙한 곳까지 왔다.

걸을 때는 언제나 다음 장면만 보였다. 산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산이 있었고, 계곡 하나를 지나면 또 다른 길이 나타났다. 하루씩 걸었을 뿐이다. 떠나는 길에서 돌아보니 그 하루들이 하나로 이어져 있다.

이 글을 연재하는 동안 고마운 사람들이 여럿 있다. 나의 길을 안내해 준 '굿스토리 투어'의 블라디미르 박 님과 내 기억의 오류를 잡아 주며 아낌없는 조언을 해 준 김성동 님, 김초원 님, 박경희 님께 감사를 전한다. 또한 나와 함께 걸으며 조지아의 길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준 도반님들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스바네티에는 아직 걷지 못한 길이 남아 있다. 내년 여름 다시 그곳을 찾을 생각이다. 멀리 바라보기만 했던 산을 걷고, 들어가지 못했던 계곡을 따라갈 것이다.

가는 곳마다 카메라 셔터를 셀 수 없이 눌렀지만, 코카서스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기에 역부족이었다.

누군가 조지아가 그리 좋냐고 묻는다면, 나는 사진 대신 배낭을 건네겠다.

산비탈 길을 걷다 바라본 풍경 [사진=박성기 작가]
박성기 여행가

◇ 박성기는 자유(도보)여행가다. 일상에 반복 속에서 문득 '길'이 그의 눈에 들어온 이후, 배낭을 메고 우리나라 길을 걷고 있다. 길 위에서 만난 풍경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사연은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걷는 동안 자연을 다시 바라보고, 삶의 속도를 늦추는 기쁨을 기록해 왔다. 길이 건네는 위로와 걷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모아 주변에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걷는 자의 기쁨', '걷는 자의 기쁨 – 그 두 번째 이야기'가 있다.

/이미영 기자(mycuzmy@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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